마틴 부쩌와 슈트라스부르크 개혁교회 전통 슈트라스부르크 부쩌의 생애 슈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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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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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마틴 부쩌와 슈트라스부르크
목 차
I. 서론
A. 개혁교회 전통이란 무엇인가?
B. 슈트라스부르크((불)Strasbourg, (독)Strassburg)란 어떤 도시인가?
II. 부쩌의 생애 (1491-1551)
A. 슈트라스부르크에서의 부쩌 (1523-1549)
B. 영국에서의 부쩌 (1549-1551)
III. 부쩌과 칼빈
A.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부쩌와 칼빈의 개혁운동
B. 칼빈이 부쩌에게 영향을 더 주었는가? 아니면 부쩌가 칼빈에 영향을 더 주었는가?
I. 서론
A. 개혁교회 전통이란 무엇인가?
‘개혁교회 전통’에 대해서 한 마디로 분명하게 전문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학자들마다 여기에 대한 견해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전문적인 신학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현상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구별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에서도 여러 종류의 교파들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여러 종류의 프로테스탄트 교파들 중에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또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es)라는 이름으로 많은 교회들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개혁교회’ 또는 ‘장로교회’의 이름으로 존속하는 교회의 신앙의 삶과 신학을 ‘개혁교회 전통’으로 명명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개혁교회 전통의 근원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개혁교회 전통은 16세기의 종교개혁 운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동 종교개혁 운동과 좌파적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재세례파 운동이나 토마스 뮌쳐 등) 외에 종교개혁 운동 속에 독일 중 북부의 루터 중심의 종교개혁 운동과 독일 남부(슈트라스부르크)와 스위스(제네바와 취리히 등) 중심의 종교개혁 운동이 있었다. 독일 중 북부의 루터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개혁 운동은 오늘날 ‘루터교회’ 전통(루터, 멜랑히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협화신조, 1557』)으로 계승되었고, 독일 남부(슈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쩌)와 스위스(취리히의 쯔빙글리와 불링거, 제네바의 칼빈)를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 개혁 운동은 유럽 대륙에서는 칼빈과 베자를 거쳐서 ‘장로교회’ 형태로 계승되었고, 영국에서는 칼빈과 녹스를 거쳐서 ‘장로교회’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개혁교회 전통’은 칼빈에 의해서 집대성되어 유럽대륙에서는 베자를 거쳐 스위스(『제네바 요리문답, 1537/1542』, 『제일 스위스 신앙고백, 1530』), 네덜란드(『네덜란드 신앙고백, 1561』) 등에서 꽃을 피웠고, 영국에서는 녹스를 거쳐 장로교회의 이름으로 스콜틀랜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8』, 『스코트랜드 제일 신앙고백, 1560』)에서 꽃을 피웠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개혁교회 전통은 루터교회 전통과 차별화되어, 칼빈을 중심으로 장로교회, 개혁교회, 칼빈주의, 개혁주의, 개혁파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혁교회 전통의 근원을 형성한 개혁파 종교개혁자인 쯔빙글리, 부쩌, 칼빈의 전통은 개혁파 정통주의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은 루이스 베르코프의 『조직신학』이나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서 나타난다. 현대신학에서 대표적인 개혁파 조직신학자는 스위스의 칼 바르트, 에밀 부룬너, 독일의 오토 베버, 한스-요아킴 크라우스, 위로겐 몰트만, 네덜란드의 베르까우어, 헨드리꾸스 베르꼬프, 영국의 토렌스 등이다.
B. 슈트라스부르크((불)Strasbourg, (독)Strassburg)란 어떤 도시인가?
프랑스 동부 알자스 지방 바랭 주의 주도. 프랑스-독일 국경으로 되어 있는 라인 강의 4㎞ 서쪽에 있다. 유럽 의회 및 주교좌의 소재지로서 대학도시이며 국제통신의 중심지이다. 라인 강을 끼고 있는 도시의 동쪽 하항(河港)은 운하를 통해 론 강과 마른 강에 연결된다. 프랑스의 주요곡물항구 중 하나인 이 항구는 연료용 기름, 식품, 공업제품도 취급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정유·야금·식품가공 공장이 있는 공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갈라져 흐르는 일 강 때문에 형성된 섬에는 옛 시가지와 대부분의 유명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1870년과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11~16세기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정성을 기울여 복구했다. 붉은 보주산(産) 사암으로 지은 이 대성당은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이 대성당은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문들과 탑이 하나 있는 비대칭 정면(주로 13세기 것)이 있으며, 탑에는 139m 높이의 우아한 15세기 뾰족탑이 솟아 있다. 프랑스 혁명 동안 파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조각품들을 떼어냈다. 이러한 조각품 중 일부는 다른 교회에서 나온 유물들과 함께 대성당 옆에 있는 메종드뢰브르노트르담에 전시되어 있다. 주교궁으로 쓰이던 18세기의 로앙 성에는 소장품을 많이 갖춘 박물관이 3개 있다. 라프티트프랑스라고 불리는 지구에는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운하와 목조가옥들이 늘어선 옛 가로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구텐베르크는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을 촉진시킨 인쇄술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발명하였다.
이 도시는 원래 켈트족의 마을이었으며, 로마 시대에 수비대 주둔도시가 되었다. 5세기에 이곳을 점령한 프랑크족이 스트라테부르굼이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842년 서(西)프랑크의 대머리왕 샤를 2세와 동프랑크의 독일인 왕 루트비히 1세가 스트라스부르의 서약이라고 하는 동맹을 맺었는데, 이 문서는 고대 프랑스어로 씌어진 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세시대에 시민들과 대주교들 사이에 세력다툼이 있은 뒤 스트라스부르는 855년부터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했으나 1201년에 자유도시가 되었다. 슈트라스부르크는 자유도시였기에 망명자들이 많았다(칼빈). 종교개혁 후 주로 신교도들이 살게 되었으나, 30년전쟁(1618~48) 동안 종교마찰을 신중하게 피했다. 1681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평화를 누리고 있는 도시를 점령한 후 레이스베이크 조약(1697)을 통해 프랑스에 합병시켰다. 프랑스 혁명 전까지 이 도시는 자치특권을 누렸다. 1792년 프랑스의 시인·음악가이며 군인이었던 루제 드 릴이 이곳에서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라고 하는 라인 사단의 군가를 작곡했다. 프랑스-독일 전쟁(1870~71) 때는 독일군이 50일간 포위공격 끝에 점령하여 독일 영토로 합병시켰다.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로 반환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0~44년 다시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 로마 직속의 주교관할구이며, 1567년 창립된 스트라스부르대학, 고딕 양식의 노트르담 대성당(11~16세기), 로앙 추기경의 저택(18세기 건립, 현재는 미술관), 기타 중세풍의 가옥 등이 있다. 1979년 유럽 경제공동체(EEC) 회원국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유럽 의회가 열림으로써 국제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인구 255,937(1990).
II. 부쩌의 생애 (1491-1551)
A. 슈트라쓰부르크에서의 부쩌 (1523-1549)
부쩌(Martin Bucer)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 중재자, 전례학자, 서로 대립하고 있던 종교개혁 집단들 사이에서 화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칼빈주의뿐만 아니라 성공회의 예배의식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부처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담당 최윤배 교수가 네덜란드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1996년에 귀국했을 때의 일이다. 최윤배 교수가 『마틴 부쩌와 장 깔뱅의 성령론』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는 말을 들은 어떤 한국 신학자는 16세기 개혁파 종교개혁자 부쩌를 『나와 너』(1923)의 저자인 유대교 하시디즘 종교사상가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로 착각하여, 최윤배 교수에게 “16세기의 깔뱅과 20세기의 유대교 사상가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라고 반문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한국 신학자는 16세기 개혁파 종교개혁자 부쩌를 불교(佛敎)의 부처로 착각하여, 필자에게 “장로교의 창시자 깔뱅과 불교의 창시자 부처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라고 아주 호기심 어린 말로 질문했다. 더구나, 부쩌와 칼빈의 역사적 신학적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 실정은 불모지와 같아서 이에 대해 더 이상 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에라스무스, 루터, 쯔빙글리, 재세례파와 열광주의 운동가들, 기타 당대의 다른 사상과 종교 등은 부쩌에게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쩌는 ‘말씀의 신학자’, ‘성령의 신학자’, ‘교회의 신학자’로서 자신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