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문화산업 아도르노의 시선에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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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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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 아도르노의 시선에서의 이해

1. 서론
2. 아도르노
3. 문화산업
①유흥문화
②이데올로기적 역할
4. 결론
1. 서론
지금 우리나라는 한류라는 이름으로 영화, 음악 등 많은 콘텐츠들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상황 속에 위치하고 있다. 리니지와 같은 게임이나 소위 K-pop이라고 불리는 가요 등이 그 사례가 된다. 이런 문화를 우리는 ‘대중문화’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대중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대중들의 문화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반대되는 개념인 ‘고급문화’ 역시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상한 문화 활동’들이 범주에 속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개념은 오래 된 개념이 아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도시로 많은 노동자들이 이주하면서 그들의 주거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노동이 끝나면 술집에 모여서 맥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들으며 여가를 보냈는데, 이 현상에서 비롯되어 생겨난 개념이 바로 대중문화, 혹은 군중문화이다. 처음 귀족계층은 이런 대중문화에 대해서 천박하고 별 볼일 없는 행동으로 여겼고, 자신들이 가진 소위 ‘고급문화’에 더욱 고집하였다. 그 뒤 학자들은 이 대중문화의 발생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대중문화에 대해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런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학자,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바라보는 학자, 구조주의적 틀을 가지고 분석을 시도하는 학자 등 여러 관점에서 여러 방법으로 문화를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시작된 ‘프랑크푸르트학파’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두고, 문화를 사회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접목시켜 분석을 시도하였다. 초창기 학자라고 할 수 있는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란 전쟁을 지나면서 나치와 파시즘의 바탕인 전체주의와, 그들이 망명했던 미국을 지배하던 독점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를 모두 겪으면서 사상들을 확립해 나간다.
이 글에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에 속하는 학자들 중에서 아도르노가 했던 연구에 중점을 맞추려한다. 아도르노는 철학적 연구를 비롯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그 중에서 그의 ‘문화산업’과 관련된 이론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 이론의 이해를 위해 아도르노의 배경을 먼저 간략하게 짚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문화산업에 대한 시선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아도르노 Th. W. Adorno. 홍승용 옮김. 「프리즘, 문화비평과 사회」p.334~335. 문학동네. 2004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Theodor Wiegengrund Adorno)는 독일의 철학자이고 동시에 미학자이면서 사회학자이다. 그는 부유한 유대인 포도주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런 부유함 덕분에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적 소양을 많이 길렀고, 대학시절 호르크하이머와 벤야민을 만나 예술분야 및 심리분야를 함께 연구했다. 그리고 문화 사회학자 레오 뢰벤탈과 우정을 나누면서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소련이나 공산당과 같은 현실참여보다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재적인 비판을 하기 시작하였다. 20년대 이후, 아도르노는 헤겔-마르크스주의적 특징을 드러내게 되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교수자격을 박탈당하고 망명하던 중에 파리에 머물던 벤야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1938년 뉴욕으로 이주했지만, 1940년 미국으로 망명하던 벤야민이 자살한 것에 충격을 받은 아도르노는 이후 대부분의 저술을 벤야민의 사상과 같은 관점에 맞추었다. 전쟁이 끝나고, 1949년 호르크하이머와 독일로 돌아오고 사회연구소의 재건을 계획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와 현존하는 사회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이런 그의 모습이 신좌파와 같은 이들에게는 실천을 포기한 것처럼 비추어졌고, 68혁명 당시 학생들에게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그 후,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게 된다.
아도르노가 겪었던 시대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과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전체주의에서의 탈출을 위해 미국으로 망명을 택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사회의 모습에 회의를 느낀다. 미국사회의 교환 불가능한 것을 무의미한 것, 악으로 규정짓는 모습이 자본주의의 탈을 쓴 전체주의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것과 저것 중에서 하나의 선택을 계속해서 강요하는 시스템이 전체주의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미국 사회에서 보았던 자본주의는 교환가치에 의거하여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시스템이었고, 사람들에게 둘 중에서 쓸모 있는 것을 선택하게 만들고 쓸모 있는 것을 생산하는 일종의 전체주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바탕으로,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두고 두 개의 기준을 설정했다. 하나는 대중문화를 형성할 때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지 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문화가 대중을 억압하는 체제나 사유 “사유는 주인이 임의로 멈추게 할 수 없는 노예이다.”(Th. W. Adorno, M. Horkheimer. 김유동 옮김.「계몽의 변증법」p.72 문학과 지성사. 2001) 아도르노에게 자유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틀에 짜인 선택에서 빠져나오는 것이고, 사유는 어떤 단절의 틈을 채우거나 불일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일치의 틈에 머무르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 중에서도 진정한 사유는 다름과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균형에서 비이성적이고 개별적인 불균형을 찾는 동시에 비이성적인 불균형에서 이성적인 것을 찾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지배체제의 모순을 폭로하는 역할까지 담당해야 했다.
에 저항하는지 이다. 이 두 가지가 충족된 경우를 건전한 대중문화로 보는 것과 달리, 두 가지가 결여된 천박한 대중문화를 문화산업이라고 칭했다.
3. 문화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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