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에릭 프롬

 1  사회과학 에릭 프롬-1
 2  사회과학 에릭 프롬-2
 3  사회과학 에릭 프롬-3
 4  사회과학 에릭 프롬-4
 5  사회과학 에릭 프롬-5
 6  사회과학 에릭 프롬-6
 7  사회과학 에릭 프롬-7
 8  사회과학 에릭 프롬-8
 9  사회과학 에릭 프롬-9
 10  사회과학 에릭 프롬-10
 11  사회과학 에릭 프롬-11
 12  사회과학 에릭 프롬-12
 13  사회과학 에릭 프롬-13
 14  사회과학 에릭 프롬-14
 15  사회과학 에릭 프롬-15
 16  사회과학 에릭 프롬-16
 17  사회과학 에릭 프롬-17
 18  사회과학 에릭 프롬-18
 19  사회과학 에릭 프롬-19
 20  사회과학 에릭 프롬-2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사회과학 에릭 프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목 차
Ⅰ. 에릭 프롬의 생애 및 배경
1. 연보
2. 생애
3. 배경
Ⅱ. 에릭 프롬의 저서와 사상
1. 사랑의 기술 : 프롬의 사랑관
- 요약 및 사랑관
- 비평
2. 소유냐 존재냐 : 프롬의 생존관 및 신마르크스 주의
- 요약 및 생존관
- 비평
3. 자유로부터의 도피: 프롬의 자유관
- 요약 및 자유관
- 비평
4. 건전한 사회 : 프롬의 사회관
- 요약 및 사회관
- 비평
5. 인간의 마음 : 프롬의 인간관
- 요약 및 인간관
- 비평
Ⅲ. 종교관
Ⅳ. 정리 및 전체 비평
- 29
Ⅰ. 에릭 프롬의 생애 및 배경
1. 에리히 프롬 연보
1900년 3월 23일 상인 나프탈리 프롬과 로자 프롬의 외아들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쟁에 대한 회의를 느낌
1918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공부, 시오니즘에 열중
1919년 하에델베르크 대학에서 사회학, 심리학, 철학 공부
1924년 프리다 라이히만을 통해 정신분석 연구
1925년 알프레드 베버의 지도 아래 유대법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1926년 프리다 라이히만과 결혼, 프랑크푸르트에서 정신분석을 연구하고 시오니즘에서 탈피
1927년 프로이트 정통파의 입장에서 정신분석에 대해 최초 발표
192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남부정신분석연구소 공동설립, 베를린 연구소에서 훈련
1930년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연구원, 베를린에서 개업
1931년 프리다 라이히만과 별거, 폐결핵 치료를 위해 다보스에서 1년간 체재
1933년 시카고 대학 객원강사, 미국으로 망명, 독일에서 아버지 사망
1934년 뉴욕으로 이사, 컬럼비아 대학교 부속 사회연구소에서 연구
1938년 사회연구소를 떠남, 영어로 최초의 논문 발표
1940년 미국 시민권 취득
1941년 베닝턴 대학교 교수, 《자유로부터의 도피》출간
1943년 화이트 연구소를 뉴욕에 설립
1944년 헤니 굴란트와 결혼
1947년 《인간 자체: 윤리심리학의 탐구》출간
1950년 베닝턴 대학교 교수직 사임, 멕시코로 이사, 미국 평화운동 참여
1951년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의과대학 원외교수, 정신분석 양성 코스 시작
1952년 헤니 굴란트 사망
1953년 애니스 프리먼과 결혼
1955년 《건전한 사회》출간
1956년 《사랑의 기술》출간, 멕시코 정신분석학회 설립, 퀘르나바카로 이사
1957년 스즈키 다이세쓰와 세미나, 프리다 라이히만 사망
1959년 뉴욕에서 어머니 사망, 미국에서 정치활동에 참여
1963년 멕시코 정신분석연구소 개설
1964년 《인간의 마음》출간
1967년 멕시코에서의 교육 활동 중단
1968년 유진 매카시의 선거운동에 참여, 심근경색 발작으로 정치활동 중지
1969년 여름에 치치노에 체재
1970년 멕시코 농민 현장조사 발표
1973년 《인간 파괴성의 분석》출간
1974년 치치노에서 1년간 체재
1976년 《소유냐 존재냐》출간
1977년 다시 심근경색 발작, 창작력 쇠퇴
1980년 3월 18일 사망
2. 에리히 프롬의 생애
1) 배움
① 어린 시절 - 탈무드 연구가가 꿈이었던 소년
에리히 프롬은 1900년 3월 23일, 독일 상공업의 중심지였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어떠한 지역들보다도 자유주의적이고 계몽적인 정신이 강한 도시였다. 부모는 모두 유태인이었고 프롬은 외아들이었다. 프롬은 자신의 부모가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자신도 매우 신경이 예민한 아이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프롬은 자신이 어릴적부터 인간들의 비합리적인 성향과 행동에 대한 의문에 자주 사로잡혔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된 원인들 중의 하나를 자신이 조급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아버지와 곧잘 우울해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 데서 찾고 있다.
프롬의 집안은 친가든 외가든 독실하게 유태교를 신봉했으며, 이러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서 프롬은 어릴 적에는 탈무드 연구가가 되려고 했다. 프롬의 증조부는 탈무드 연구가였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유태인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랍비였고 프롬은 일생 동안 그를 흠모했다. 프롬은 12세부터 16세까지 정기적으로 탈무드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다. 프롬은 어릴 때부터 이러한 랍비들의 삶의 태도에 의해 많은 감화를 받고 그들의 정신 세계를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프롬은 모든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근대 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인세만 받았다. 아니 인세에도 관심이 없었다) 프롬은 오전은 연구와 사색을 위한 신성한 시간으로 생각하면서 오전에는 절대로 돈 버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리치료로서 돈을 벌 경우에도 오직 오후에만 일을 했다.
② 청년시절
- 제 1차 세계대전의 충격
프롬은 제1차 세계대전이야말로 자신의 청년기에 겪은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을 19세기에 서구를 지배했던 낙관주의와 계몽 사조를 종결시킨 가장 잔혹하고 비합리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물론 전쟁만 가지고는 프롬은 14세의 소년이었기에 어린애다운 관심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해서 교사들이 보인 태도 때문에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 프롬의 라틴어 교사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정작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평화를 내세우던 사람이 일변하여 전쟁을 환형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그의 관심이 위선적인 것이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프롬은 그후 자신은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 독일 전역에 퍼진 영국인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 가운데 마찬가지로 적국의 국가를 배우는 것을 학생들이 반대하자, 선생님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영국은 단 한 번도 전쟁에 진 적이 없어!’라는 말을 들은 프롬은 이 소리를 광기와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성의 소리로서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선생님의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는 두고두고 교훈이 되었다.
프롬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으로 인해서 프롬은 대학에서 원래 법학을 공부했다가 심리학과 철학 그리고 사회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고 정신분석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프롬은 세계 평화화 형제애에 입각한 사회 구조를 실현하려는 깊은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공인된 이데올로기와 공적인 선언 따위에 대해서 극도로 회의적이 되었으며,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