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한국 기독교와 이단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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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 기독교와 이단종파
Ⅰ. 기독교 역사와 이단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이단과의 긴장과 갈등은 교회의 신학과 신앙이 형성되고 교회의 정체성이 재확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왔다. 초대교회의 이단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논쟁이 주를 이루었다. 이 논쟁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회의를 통해 예수님이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라는 중요한 신학적 진술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중세교회의 이단논쟁은 교회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다. 중세 유럽사회에서 기독교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문화인 동시에 삶의 공동체였다. 따라서 중세교회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회의 권위 또한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에 도전은 곧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자들은 파문, 투옥, 사형 등의 형벌을 받았다.
종교개혁교회의 이단논쟁은 성서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절대적인 중세교회의 교황권이 실추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운동은 교회 내부로부터 시작되었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낙스 등의 개혁자들은 면죄부, 선행과 고행, 금욕주의적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진실한 회개를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선포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 말씀 중심의 개혁주의신앙은 확립되었고, 이때로부터 성서는 개신교 이단분별의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를 잡는다. 종교개혁 이후 형성된 유럽교회의 교파주의는 신대륙 북미로 이식되어 정착한다. 북미교회의 교파주의와 사회문화적 다양성, 식민개척지의 진취성과 불확실성은 식민지의 개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종교에 쉽게 관심을 갖고 수용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탁지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현대종교」(2009. 5-11) 참조. 캘리포니아 지역 신흥종교운동 발흥에 관해 연구해온 캘리포니아대학교(UCSB) 종교연구소는 새로운 미국 서부지역 종교운동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첫째, 모든 종교운동은 종교지도자(prophet)를 필요로 한다. 둘째, 종교지도자들은 기존의 종교적 가르침과는 구별과는 새로운 가르침(promise)을 가지고 있다. 셋재, 새로운 교리뿐만 아니라 이를 현실화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plan)이 필요하다. 넷째, 새로운 종교운동은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로 인해 그 성패의 가능성(possibility)dl 영향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종교운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안전하고 배타적으로 그들의 종교생활을 영위해 나아갈 수 있는 장소(place)가 필요하다. 이러한 분석(5Ps)은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들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좋은 분석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미국교회의 교파주의 선교는 한국교회의 교파주의 형성뿐만 아니라 한국이단의 발흥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정 교파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기 어려운 다양한 교파주의의 형성과 함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불안정성은 한국이단들의 형성과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단의 발흥기와 교회의 성장기는 일치한다. 교회가 박해를 경험할 때는 교회의 성장과 신앙의 성숙을 이루지만, 교회가 성장할 때는 신앙의 변질과 이단의 발흥을 경험한다. 한국에서도 초기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이단들도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이단들은 세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외국에서 들어온 이단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왔으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 1904년 전래)와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여호와의 증인,1912년 전래)가 선교초기에 그리고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몰몬교, 1950년 전래)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유입되었다. 두 번째 유형은 한국에서 자생한 이단들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한국이단 계보의 본격적인 시초가 된 문선명의 통일교(1954년 설립)와 박태선의 천부교(1955년 설립)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세 번째 유형은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시작된 제2세대 이단들이다.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안식교로부터, 이만희의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은 박태선으로부터, 그리고 정명석의 기독교복음선교회(JMS)는 통일교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한국이단들은 일제강점기하에 뿌리를 내리고, 해방 후 한국전쟁 시기에 본격화되었으며, 군사정권하에서 급속히 성장했다.
Ⅱ. 일제강점기하 이단
일제는 신흥종교운동을 유사종교로 구분하고 통치원칙에서 벗어나는 종교 활동을 철저히 통제했다.「조선통치의 최고방침」(1910)과 「교육칙어」(1912)에 따르면 일제 조선통치의 목적은 천황중심의 내선일체로,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이어졌다. 일제의 이러한 조선통치 원칙은 기성종교 및 소위 유사종교에 대한 정책에 적용되어 종교포교활동, 종교시설의 설립도 조선총독부에 자세하게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모든 종교 활동에 대한 총독부의 「포교규칙」은 신도, 불교, 기독교 등 기성종교들에 대해 주로 적용되었지만, “종교와 유사한 단체”에서도 적용되었다. 김승태 편역, 『일제강점기 종교정책사 자료집』(서울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각 지역에서 발흥하던 신흥종교 단체들의 통제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1935년 무라야마 치준(村山智順)으로 하여금 『조선의 유사종교』라는 자료집을 발간하게 된다. 이 자료집은 한국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들과 특히 일제의 통치에 협조적이지 못한 새로운 종교단체를 ‘유사종교’로 분류하고 종교탄압을 위한 구실로 사용한다. 또한 일제는 조선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단체들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실시한다. 기독교 소종파운동들 박동기의 시온산제국과 이순화의 정도교는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박해했다. 반면 반선교사적인 정서를 나타내면서 소위 조선적 기독교를 지향하던 최중진의 자유교, 이만집의 자치운동, 김장호의 조선기독교회 등의 경우에는 일제의 종교정책의 영향 아래 발흥하게 된다.
일제하 기독교이단운동은 1930년대 이후에 본격화되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의 대륙침략은 노골화되고 조선은 전시체제하 전쟁협력 강요와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고통받게 된다. 사회적 불안정상과 불확실성은 한국교회 안에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닌 기독교이단운동 발흥의 배경이 된다. 무엇보다도 일제하 이단운동은 구원에 대한 성적(性的) 접근이 두드러진다. 세계교회사는 일면 성(聖, spirituality)과 성(性,sexuality)의 긴장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이단운동의 뿌리에도 이러한 성적 접근(sexualmotif)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한국 이단운동의 뿌리라고라고 할 수 있는 김백문은 문선명과 박태선 등 많은 기독교이단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교리적 영향을 준다. 김백문의 『성신신학』(1954), 『기독교근본원리』(1958), 『신앙인격론』(1970)에 나타난 주장한 문선명의 『원리강론』과 유사한 것을 보여준다. 김백문은『기독교근본원리』에서 타락에 대해 설명하면서 “여인 해와로서 유인된바 선악과적 범행이란 사신(뱀)으로 나타난 악령과으 육체적 음행을 말하게 되는 일이니 즉 사신으로 직접적 육체성교를 범행한 데서 해와로서 여자의 처녀정조를 유린당한 것도 컸으나 혈통에 미친 죄악성은 곤 육체의 성욕감을 거기에서 받아가진 그것으로 창조본성의 사랑의 반대 성리인 정욕의 육성으로 악화케 되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김백문, 『기독교근본원리』(서울: 이스라엘수도원, 1958), 485.
문선명도 『원리강론』에서 재림주가 한국에 나타나 지상천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김백문의 교리에 영향을 받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후 다른 이단단체들의 교리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교리로 인해 이단단체 교주들에 의한 성적(性的)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즉 성적 타락의 회복은 교주와의 성적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감춰진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복귀과정은 사회적 통념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비윤리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실정법의 제재를 받기도 한다. 한국의 이단운동들이 독자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발흥해 왔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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