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 H G 아펜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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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배재학당 - H G 아펜젤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배재학당
( H.G.아펜젤러)
◇ 목 차 ◇
Ⅰ. 서론
Ⅱ. 본론
1. 설립자 H. G. 아펜젤러
1) 한국에 온 아펜젤러
2) 아펜젤러의 공헌
3) 아펜젤러의 가족
2. 배재학당
1) 배재학당 연혁
2) 교명의 변천
3) 교육의 이념 제도 및 교과 과정
4) 신앙교육
5) 배재학당을 졸업한 인물들
3. 배재학당의 애국운동
1) 배재 체육과 민족운동
2) 3.1 운동과 배재
3) 신사 참배와 배재
4) 독립협회와의 관계
4. 오늘날에 미친 영향
1) 배재 중학교
2) 배재 고등학교
3) 배재 대학교
Ⅲ.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한국 개신교 선교의 역사는 한국 근대 교육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국에 온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의 방편으로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근대식 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이 시대에 세워진 기독교 학교들은 기독교적 복음에 입각한 교육은 물론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정책에 맞서서 구국운동의 차원에서 민족교육을 실천하였고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근대학교를 세웠지만, 여기서는 미국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설립자 H.G 아펜젤러
H. G 아펜젤러(1858-1902)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바니아주 수더톤(Souder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일 루터교회 교인이었으며, 1882년에 랭카스터에 있는 개혁교회의 프랭클린 마샬 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졸업했다. 그해 가을에 드류신학교(Drew Theolgocial Seminary)에 입학하여 3년의 정규과정을 마치게 되었는데, 드류(Drew)신학교에 입학하고 설교를 하면서 확신과 소명에 대한 복종과 헌신을 각오하면서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본 선교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1881년 무렵 그의 친구 워즈워즈가 희망하던 ‘은둔의 나라, 조선’에 못 가게 되자 워즈워즈 대신 선교의 나라를 일본에서 한반도로 바꾸게 되었다. 1884년 11월에 엘라 제이 닷지(Ella J. Dodge)와 결혼하고 감리교 한국선교부(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첫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1884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 출발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안수를 받고 1885년 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재물포에 상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생동안 파란만장한 우리민족 개화기의 역사 속에서 조선 8개 도 가운데 6개 도에 걸친 장장 1,800마일의 여행을 두루 다니며 자기희생적인 섬김을 다하다가 마침내는 1902년 6월 11일 밤 성서번역위원회 회합의 일로 목포를 향하여 항해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갑작스러운 선박 충돌사고가 났다. 깨어 있던 아펜젤러는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정신여학교장 도티로부터 부탁받은 한 여학생을 구출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구조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1) 한국에 온 아펜젤러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날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곧바로 미국 북감리교 선교본부에 보고서를 보냈다. 그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날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가 조선에 처음 도착한 때는 바로 전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여파로 정황이 매우 불안하였다. 아펜젤러는 임신한 아내와 일단은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갔다가 6월 20일에 제물포로 다시 왔다. 아펜젤러 부부는 한 달 이상 제물포에 머물다가 7월 29일에 서울로 들어갔다. 서울에 도착하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아펜젤러는 자기의 학교에 벌써 4명의 학생이 다닌다고 편지에 썼다. 이것은 당시 미국 대리공사 폴크(George Foulk)가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는 아펜젤러의 뜻을 고종에게 전해서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2) 아펜젤러의 공헌
아펜젤러는 첫 번째 배재학당 창설에 관한 공헌을 했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다. 1886년 6월 8일에 고종은 ‘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지어주는 동시에 학교 간판을 써 주었다고 한다. 학교 교훈으로는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20:26-28)는 말씀에 따라 1895년부터는 대학부까지 병설하였다.
두 번째 공헌으로는 정동감리교회 창립을 들 수 있다. 정동교회는 감리교회의 맨 처음 교회인 동시에 장로교회의 새문안교회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어머니 교회이다. 1888년 11월 아펜젤러가 북한 깊숙이까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최병헌을 전도사로 채용함으로써 교회 성장의 큰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배재학당의 한문 선생과 아펜젤러의 어학 선생을 겸하면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개시했다. 1896년 10월 26일에는 정동 예배당이 신축되었는데, 이것은 벽돌 예배당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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