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세력의 성격과 서경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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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묘청세력의 성격과 서경반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목차-
1. 머리말
2. 묘청세력의 성격
1) 묘청세력의 형성
2) 묘청세력의 성격과 유신지교(維新之敎) 반포
3) 서경세력
3. 서경천도운동의 배경과 성격
1)서경천도운동의 시대배경
2)서경천도론의 전개
3) 풍수와 도참
4. 서경반란
1) 서경반란의 전개과정
2) 서경 반란의 실패 요인
3) 서경 반란의 결과와 평가
5. 맺음말
6. 참고문헌
1. 머리말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신채호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이다. 당시 고려 인종 시기는 숙종, 예종을 거쳐 이어져오던 대외관계의 변화와 더불어 권력을 둘러싼 집단들의 다툼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러한 다툼 속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묘청세력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은 인종의 왕권강화와 더불어 일련의 정국을 운영하게 된다. 이들 묘청세력으로 불리는 세력이 운영하던 정국은 인종의 변화와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타 세력과의 다툼을 통해 결국 묘청의 난이라는 형태로 마무리되게 된다. 이들은 이자겸 세력과 같은 외척이나 한안인 세력과 같은 신진세력과는 다른 성격과 모습을 보인다. 일정한 지역적 특징을 기반으로 인종이라는 왕과 함께 정국을 운영한 세력으로 측근세력의 모습과 신진세력의 모습을 띄기는 하나 그 실질적 모습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성격은 이들이 벌인 일련의 운동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인종의 왕권강화를 통해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본 발제에서는 이러한 묘청세력의 성격과 이들이 시도한 서경천도운동 그리고 서경반란을 알아보고자 한다.
2.묘청세력의 성격
1) 묘청세력의 형성
묘청세력은 인종대 이자겸의 제거 이후 인종의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하려 측근세력을 양성함에 따라 등장한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자겸에 의해 축출되었던 김안이 다시 정계로 복귀한 후 인종의 측근관료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김안은 정지상 등의 서경세력과 연결을 모색하였는데, 인종 5년 2월 인종이 서경에 행차하여 묘청, 백수한(白壽翰) 등을 가까이 하고, 정지상의 상소를 계기로 척준경을 제거하게 되면서 묘청 즉 서경세력이 정치의 중앙에 등장하게 된다. 오영선, 1993「인종대 정치세력의 변동과 정책의 성격」『공동연구:12세기 전반기 정치세력과 정치운영』 p78
새롭게 대두한 묘청(서경)세력은 이자겸의 제거 이후 인종의 정치주도권을 뒷받침해주는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의 일반관료는 크게 서경 출신의 관료와 기타 관료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이자겸의 난을 통해 기존 관료들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의 약화는 왕권강화와 맞물려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자겸의 제거이후에도 인종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질서가 수립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이자겸을 제거한 척준경과 그 지지세력, 김안과 같은 반 이자겸 세력, 인종의 즉위와 관련하여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문공인, 문공유, 최유청, 한유청 등이 다시 등장하여 정치성향을 달리 하였던 인물들로 정치지배세력이 구성되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남인국, 1990「고려 인종대 정치지배세력의 성분과 동향」『역사교육논집』15 p88
이러한 정치상황하에서 인종은 어느 세력도 자신을 확고히 지지해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고 김안을 매개로 당시 정치지배세력 구성원과 성격을 달리하는 정지상·묘청·백수한 등의 서경세력과의 연결을 꾀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서경세력은 집권의 명분을 위하여 국가적 위기의식의 확대를 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반 제도적 개혁을 꾀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서경으로의 천도를 통한 정치권력의 획득을 의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영선, 위의논문 p78
2) 묘청세력의 성격과 유신지교(維新之敎) 반포
묘청세력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지역적 기반을 서경에 두고 있는 인물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정지상, 묘청, 백수한 이외에 묘청의 난에 가담했던 분사시랑 조광, 병부상서 유참은 모두 서경 출신 내지는 서경을 기반으로 한 관직에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정지상, 백수한, 묘청 등이 당시 고위직에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천도논의를 일으키는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왕의 전격적인 후원이 있음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앞서 척준경이나 지녹연 조선 숙종 때의 무신. 고려 현종 때의 상장군 채문(蔡文)의 증손자. 음관(蔭官)으로서 내알자(內謁者)가 되고,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재간이 좋다고 일컬었다. 1683년(숙종 9)에 여진(女眞)을 정벌한 공으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승진, 인종 때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는데, 내시 김찬(金粲)·안보린(安甫麟)·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대장군 권수(權秀)·고석(高碩) 등과 공모하여 이자겸(李資謙)·척준경(拓俊京)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과는 달리 무적인 기반보다는 문장력이나 사상적인 기반을 지닌 인물들로 왕으로서는 새로운 혁신정치를 통한 정국운영을 위해 정신적인 기반을 제공할 수 있고, 특히 태조 이래 정신적 지주이자 고구려계승의식의 근거지인 서경지역출신을 기용함으로써 서경천도를 주도하고 자신은 동조하는 입장에서 참여하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강옥엽, 1998「高麗前期西京勢力의 硏究」『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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