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선독] 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문학 세계(노계의 생애, 노계의 문학세계, 가사속에 담긴 노계의 삶과 의식, 노계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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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문학선독] 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문학 세계(노계의 생애, 노계의 문학세계, 가사속에 담긴 노계의 삶과 의식, 노계를 통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문학 세계
※ 차례 : 1. 노계의 생애
. 2. 노계의 문학세계
. 3. 가사속에 담긴 노계의 삶과 의식
. 4. 노계를 통해
※ 출처 : http://blog.naver.com/bluesun226?Redirect=Log&logNo=1934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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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계의 생애
박인로(1561~1642)의 자는 덕옹,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이라 하며 본관은 밀양이다. 중시조 진록의 10세 손이며, 승의부위 석의 아들로 영천군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나 82해를 살았다. 출생으로부터 31세까지는 성장 및 수학기였고, 32세부터 50세까지는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부기, 51세부터 82세까지는 안빈낙도를 실천궁행한 유자기였다.
노계의 성장과 수학과정에 대학 기록은 별로 없으나 그의 행장에 "명달여신하여 가르치지 아니해도 자능통해했다"는 기록으로 볼때,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13세 때에 지었다는 한시에는 권력층에 대한 비판과 농촌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있다.
32세(1582)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의 의병장 정세아의 별시위가 되어 활약하였다. 38세 때에는 경상도 좌병사, 성윤문의 막하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 때 성윤문의 명에 의하여 를 지었다. 39세때에는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선전관을 잠깐 지낸뒤, 조라포 만호가 되어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들을 정성껏 무휼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임무를 마치고 귀향하자 사졸들이 그의 청렴결백하고 고고한 인품과 은덕에 감사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의병활동과 미관말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남아의 대사업은 문장임"을 깨닫고 공맹의 제서와 주자의 부주에 잠심하여 침식을 잊으며 깊은 밤에는 묵상으로 천고의 성현을 생각하였고 꿈속에서 주공을 만나 성 경 충 효 4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는 등 유학자로서의 자수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한음 이덕형,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지산 조호익과 같은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51세때에 용진에 있는 사제로 한음을 찾아가 종유하면서 그를 대신하여을 지었고 를 지어 자기의 곤궁한 생활상을 노래하였다. 57세 때에는 한강이 동래 온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구 검단동 금호강변의 소유정에 들린적이 있는데 이때 를 노래 불렀고, 59세 때에는 한강이 울산 초정으로 온욕 갈때, 따라가 시조 2수를 지었다. 69세 때에는 여헌을 따라 입암에 노닐면서 시조 입암 29곡을 지었으며 여헌으로부터"무하옹은 늙음을 모르고 발분망식하며 유학에 힘쓰는 동방의 인호"라는 칭찬을 받기도하였다. 이렇게 강호의 명망있는 유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도학에 정진하다가 70세때에 용양위부호군으로 우로를 받았고 안찰사로 내려온 상국 이명이 노계를독행특립지사로 계를 올리자 인조는 군에 명하여 미육을 내리고 그 자손을 도와 주도록 하였다. 75세때에는 영남 안찰사의 덕치를 찬양하는 를 지었고 76세 때에는 노계곡에 유거하면서 를 지었다.
이와 같이 노계는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서 가정을 잊고 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치다가 전쟁이 끝난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유학자들이 지향하는 충효와 안빈낙도를 몸소 실천하면서 온거구도적인 삶을 살았다. 가사 와등 일부 한시에 가난으로 겪게 된 현실적 어려움과 갈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으로 볼때, 노계는 의식 지향적인 측면에서는 사대부에 속했으나 현실생활적인 측면에서는 몸소 농사를 지을수밖에 없었던 향반계층으로서 전쟁 후의 극심한 궁핍으로 인하여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다소의 심적 갈등을 일으킨 것 같다. 그러나 노계는 가난이라는 현실문제를 유교적 이상인 안빈낙도 사상으로써 극복하고 자연을 안식처로 삼아 초탈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는 67수의 시조와 9편의 가사를 남기고있는데 시조는 와 같이 교훈적인 내용을 주로 관념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가사는 고사성어와 한문어구를 많이 사용하여 참신성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으나 구체적인 경험을 일상어를 사용하여 묘사함으로써 사실성을 띨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의 구상이 웅장하면서 문체가 질박하고 유려하기 때문에 정철, 윤선도와 함께 3대 시가 작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한미한 시골 양반의 아들
박인로의 작품은 그의 삶과 밀착된 것이 많아서 작품을 통해서도 간접적인 추정을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의 행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문집 속의 「행장」이다. 이는 노계 집안과 세교가 있던 정세아의 후손인 정규양이 1704년, 노계가 죽은 지 62년 뒤에 지은 것이다. 이 「행장」에 따르면 그는 1561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덕옹,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이라 한다. 그의 본관은 밀양인데, 그의 집안은 증조부 무렵에는 이미 상당히 몰락한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 영손만 해도 홍문교리 장악원정을 맡고 풍천군수를 역임했으나, 증조 정은 집경전 참봉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조부 윤청은 교수를, 부 석은 승의부사를 지냈다. 그의 외할아버지 역시 참봉에 그친 주순신(朱舜臣)이었다. 이를 보건대 그는 점차 한미해지면서 무반 집안으로 기울어가고 있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더구나 그가 무과에 급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둘째 아들이 효성으로 천거되어 창릉 참봉을 한 것으로 집안 벼슬은 중단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이후 그의 집안 족보는 오랫동안 벼슬과 무고나한 이름의 나열로 이루어지고 있다. 벼슬과 멀어진 양반. 그의 집안은 이처럼 양반이면서도 사실상 서민화한 처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신분제 사회에서 그의 미묘한 위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양반으로서의 최소한의 교육은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3살 때 지었다는 한시 「대승음(戴勝吟)이 「행장(行狀)」에 인용되어 있고 문집에도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