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론 - 생애, 시적 경향,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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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론 - 생애, 시적 경향, 시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오 장 환
Ⅰ. 생애
오장환은 1918년 5월 15일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농업을 하는 아버지 오학근과 어머니 한학수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22세 차이가 나는 둘째 부인으로, 본처가 죽자(1929) 오장환이 14세 되던 1931년에야 정식으로 혼인 신고가 되고 비로소 오장환은 호적에 서자에서 적출로 오르게 된다.
오장환은 그가 태어난 고향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1927년 10살 되던 해 제2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로 이사를 한다. 안성은 그 집안의 선영이 있고 해주오씨의 집성촌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 처음에는 좀 낯설었겠지만 일가 친척들이 모여 사는 본고장을 찾아간 것이다. 오장환이 19세 되던 해인 1936년에 서울로 다시 이사를 하는데 이러한 잦은 이사와 서출이라는 가정환경은 오장환의 성격과 시세계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장환은 1930년 안성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하여 중동학교 속성과를 수료한 뒤 이듬해 휘문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부터 오장환은 시작 활동이 비로소 시작되었고, 시인 정지용과의 만남도 휘문고보에 들어가면서 이루어진다. 오장환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정지용 시인을 만나 시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문예반 활동을 하며 ≪휘문≫이라는 교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휘문≫은 정지용 시인이 창간 때부터 관여하여 만들었던 교지다. 당시 2학년이던 오장환은 여기에 처음으로 작품(「아침」,「화염」)을 발표한다. 이 두 작품은 「목욕간」보다 먼저 발표된 것으로 소년시절부터 오장환이 얼마나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오장환은 휘문고보 3학년 때인 1933년 11월에 그의 첫 번째 시 「목욕간」을 ≪조선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장시 「전쟁」도 이 때 쓴 것이다. 이어서 다음해에 ≪조선문학≫에 연작시 「카메라·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런 초기 작품들에는 시적 성숙미 보다는 실험 정신과 젊은 감각들이 잘 나타나 있다고 평가된다.
그 후 1935년에는 휘문고보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자퇴를 하는데, 기록상의 자퇴 사유는 동경유학을 위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학업성적의 부진이 보다 큰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장환이 동경에 체류했던 기간은 1935년 4월부터 1940년까지로 간헐적으로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지산중학교를 수료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시인부락】, 【낭만】의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서정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부락】은 서정주 등과 동인활동을 주도하였고 2차의 동인지를 간행하였으며 김달진, 김동리, 김상원, 김진세, 박종식, 여상현, 이성범, 임대섭, 정복규, 함형수 등 12명이 참가하게 된다. 여기에 참여한 것으로 오장환은 생명파 시인으로 불려지게 된다. 또한 【낭만】은 민태규 등이 중심이 되어 이용악, 임화, 박세영, 윤곤강, 이찬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는 1937년 3월에 다시 일본 명치대학에 입학하였고, 【자오선】 【자오선】은 1937년 11월 창간되었다. 오장환은 여기에 「황무지」, 「신부의 노래2」등을 실었다.
동인으로 참여하여 시작 활동을 하였다. 그해 8월 첫 시집 『성벽』이 자비로 풍림사에서 간행되었다. 오장환은 다음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명치 대학 전문부를 중퇴하고 귀국한다. 물려받은 유산을 기반으로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남만서방을 경영하였고 여기서 그의 두 번째 시집인 『헌사』를 비롯하여 김광균의 첫 시집 『와사등』과 서정주의『화사집』등을 간행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그는 나이 28세 되던 해 신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광복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의 시집 『병든 서울』의 시편들은 8·15를 계기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그는 2월에 결성된 조선 문학가 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역시집인 『에세-닌 시집』을 간행하였다. 오장환은 보들레르, 베를레르, 랭보, 말라르메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위시하여 엘리엇, 니체, 리드 뿐만 아니라 특히 에세닌 시에 심취해 있었다. 오장환의 향토성을 소재로 한 고향시편들 상당수가 에세닌의 시와 연관되는데 에세닌 시의 번역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김학동, 오장환 평전, 새문사, 2004.)
1947년 2월 강화 출신 장정인과 결혼하였고, 그해 6월, 1937년 7월에서부터 1945년 8월 사이에 쓴 작품들을 묶어 시집 『나 사는 곳』으로 간행하였다. 1945년에서 1947년은 오장환 생애 최고로 작품활동이 왕성했던 시기로 두 권의 창작시집과 한 권의 역시집을 간행하는 등 문단활동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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