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개론] 송강정철의 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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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송강정철의 문학세계
Ⅰ. 들어가는 말
한국 문학사에서 송강의 문학은 하나의 커다란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송강은 정치가로서 활약하며 많은 업적과 숱한 파란을 남기는 한편, 당대의 국문학과 한문학에 깊이 심취하여 많은 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국문시가로서 사설시조인 를 포함하여 시조 88수, 가사 4편과 한시 760여 편에 이른다. 이에 본 발제에서는 그의 삶을 살핀 후, 고전 연구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원전연구를 통해 판본의 간행과정과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그리고 그의 가사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사상을 살피고, 가사 작품 중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는 관동별곡과 속미인곡 두 작품을 자세하게 살피도록 하겠다.
Ⅱ. 송강의 문학과 사상
1. 송강의 삶 전영진, 송강가사다산시선, 홍신문화사, 1995, p.8~9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본관은 연일, 자는 계함, 송강은 호다. 돈영부 판관 유침의 아들로 어려서 인종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 유의 부인인 둘째누이로 인해 궁중을 출입, 이후 명종이 된 경원 대군과 친숙하게 지냈다.
열 살 되던 해인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큰형은 죽고 아버지는 유배를 당하였는데, 관북정평연일 등의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따라서 송강에게는 학문에 몰두할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의 시에 짙게 깔려 있는 절망적 허무감도 이로부터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은봉, 송강 문학의 전기적 배경연구, p.22
1551년에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전라도 담양으로 이주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로 인해 체험하게 되는 성산 아래의 우거진 대나무 숲, 기이한 바위와 서정, 이른 봄의 雪中梅, 겨울 오비산 위의 학의 무리 등은 송강의 시적 정서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된다. 이은봉, 앞의 책, p.22
이 시기에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송순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성혼송익필 등의 유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26세 때인 1561년(명종 16년) 진사시에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사헌부지평을 시작 좌랑현감전적 등을 거쳐 31세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에 다시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 암행어사 등을 지내다가, 40세 때인 1575년(선조8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송강은 자연과 교류하는 가원데 시와 술의 풍류에 빠지기도 하고 학문에 몰두하기도 하며 세월을 보낸다. 그의 시 중에 이 무렵에 쓰여진 것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다시 조정에 나와 사산집의직제학 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하였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과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48세에 예조판서,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다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사직하고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하였다. 이때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성산별곡의 작자와 제작연대에 대한 異說로는, 작자를 석천 임억령이라고도 하였으나 그 설득력은 부족한 편이며, 제작연대도 “棲霞堂遺槁”가 발견되어서 김사엽 김사엽, 송강가사신고, 경북대논문집(제 2집), 1958,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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