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도의 생애 리카도의 경제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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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도의 생애 리카도의 경제이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경제학자는 입을 열었다 하면 으레 돈에 관한 얘기를 하지만, 경제학자치고 자신이 큰돈을 번 사람은 별로 없다. 이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번 경제학자 말고도 또 한가지 드문 것이 있는데 백만장자가 열심히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다니는 광경이 바로 그것이다. 백만장자는 자기를 부자로 만든 사회질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찬탄할 뿐이지, 거기에 뜯어고쳐야 할 측면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리카도는 이 두 가지에서 모두 예외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를 끄는 사람이다.
리카도는 유태계 독일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부터 런던 증권거래소의 중개업자로 큰 재산을 모은 아버지의 사업을 거들기 시작해 일찍이 사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21세 때에는 종교문제로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일신론자가 되어 퀘이커교도와 결혼했다. 그로 인해 그는 혼자 힘으로 자립해야 했다. 증권거래소 일을 계속하는 동안 재능과 특성을 인정받은 리카도는 어느 유명한 금융회사로부터 후원을 받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는 단 몇 년 만에 재산을 모으고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되자 다방면으로 재능을 펼쳐 문학과 과학, 특히 수학·화학·지질학 분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799년 우연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Wealth of Nations〉을 읽게 되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다소 즉흥적으로 시작했지만 차츰 집중력을 보이면서 이후 10년간 경제학 연구에 전념했다. 최초로 출판된 저서는 〈지금(地金)의 고가(高價), 지폐의 평가절하를 나타내는 증거 The High Price of Bullion, a Proof of the Depreciation of Bank Notes〉(1810)로 1년 앞서 〈모닝 크로니클 Morning Chronicle〉에 발표했던 여러 편의 소고(小考)를 모아 새롭게 편찬한 것이었다.
이무렵 리카도는 장차 그의 지적 발전을 심화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몇 사람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고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였던 제임스 밀로서, 리카도의 정치고문이자 편집고문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덤이었고 또 한 사람의 친구는 토머스 맬서스였다. 이후 리카도는 인구증가율이 식량공급증가율을 앞지른다고 하는 맬서스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1815년에는 곡물 수출입을 규제하는 곡물법을 둘러싸고 또 한 차례 논쟁이 벌어졌다. 밀의 가격이 하락하자 의회는 수입밀에 대한 관세를 높였고, 이로 인해 대중적인 항의가 촉발되었던 것이다. 리카도는 당시 〈저곡가가 자본의 이윤에 미치는 영향에 따른 시론 Essay on the Influence of a Low Price of Corn on the Profits of Stock〉(1815)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수입곡물에 대한 관세인상이 지주의 지대 수입을 높이는 반면 생산자의 이윤은 하락시킨다고 주장했다.
곡물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1년 전, 리카도는 42세의 나이로 사업계에서 은퇴하고 글로스터셔에 정착하면서 그곳의 넓은 토지를 사들였다. 1819년에는 당시 흔히 행해지던 방식으로 돈을 주고 하원의 의석을 사 포르타링턴을 지지하는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는 자주 연설을 하지는 않았고 그의 자유무역사상이 하원의 지배적인 견해는 아니었지만 경제문제에 관한 명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매우 존중되었다.
리카도는 또한 자신의 저서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1817)를 통해 고전학파 사상체계를 정교히 세워 올리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리카도를 고전학파 정치경제학을 대표하는 자리에 앉혀 놓았다. 1823년 병으로 의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그는 51세가 되던 해에 일생을 마쳤다. 그후 리카도의 방법과 학설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이 늘어났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현대 보수 경제학이 다 같이 리카도 경제학으로부터 갈려나와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Ⅱ. 리카도의 경제이론
리카도의 이론인 경제원리는 3편 32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1편은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치론, 분배론, 국제무역론을 중심으로 경제일반론을 다루고 있다. 제2편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세, 재정의 이론을 다루고 있다. 제 3편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사성을 띠고 있는 논쟁들을 다루었으며 기계론이 추가되었으나 그 내용은 빈약하였다. 특히 국제무역에 있어서 그가 제시한 비교우위론은 아직도 그것을 대체할 만한 이론이 없을 만큼 우수한 것이었다.
1. 노동가치설
리카도가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노동가치론이다. 그는 재화의 진정한 가치는 투하노동량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투하노동가치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평생토록 가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였으나 상품의 가치가 상대적인 노동투입량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기본적인 가치론의 내용을 포기하지 않았다. 즉, 그는 가치란 교환가치로서 이를 결정하는 요인은 효용, 희소성 및 노동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재화는 가치를 가질 수 없으나 그는 효용이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희소성도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지만 희소성 하나만으로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상품은 노동에 의해서 재생산되지 않는 상품으로 유명한 화가의 그림, 조각. 진귀한 책 및 주화 등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품은 그 수량이 적으므로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재생산되는 상품이기 때문에 그의 노동가치론이 적용될 수 있는 상품은 긴 시간의 노동에 의해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경제학의 많은 오류가 가치론 때문에 발생하며, 경제학자들 사이의 견해차이가 가치라는 모호한 개념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가치척도로서의 지배노동량을 부정하고, 투하노동력과 지배노동량을 결코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지배노동량은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되는 가변적인 수량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상대적인 노동투입량만이 교환가치를 결정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이용해서 상품의 교환비율과 그 변화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즉, 그는 노동투입량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노동은 동질적이어야 하며, 생산과정에 있어서의 자본과 노동의 결합비율도 동일해야 하고, 고정자본의 내구성의 정도와 유동자본의 회전율이 같아야만 상품은 노동투입량에 따라 교환된다고 보았으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노동투입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상품이 있는가 하면 자본투입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상품도 있다. 이것이 투하노동가치설의 가장 큰 취약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환가치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노동투입량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가치론은 투하노동가치론이라고 하며, 많은 사람들은 그를 노동가치론의 대변자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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