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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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탈리아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전후 이탈리아 노동조합운동의 재구축은 많은 점에서 독일과 다른 궤적을 보였다. 이는 부분적으로 전쟁이 크게 다른 양상을 띠며 종료됐기 때문이다. 1943년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까지 진격이 임박했을 때 무솔리니는 궁정 쿠테타로 축출되었고, 곧이어 새로운 정부가 휴전협상에 나섰다. 새 정부는 또, 당시 이탈리아 상당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가하면 일부 북부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 잔당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던 독일 점령군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연합군이 점차 남부 이탈리아부터 치고 올라오자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던 강력한 빨치산 운동이 조직적으로 급속히 전개됐고, 이 빨치산 운동은 북쪽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많은 역설적인 상황이 뒤따랐다. 첫째, 나치 독일의 경우 무조건 항복하고 수년간의 연합군 통치아래 들어간 반면 무솔리니가 사라진 이탈리아 파시스트 국가는 적국에서 연합군으로 지위를 바꿔 전쟁 승전국 중 하나로 등장했다. 그 결과 연합국 점령 당국은 새로운 이탈리아 정부에 권력을 급속히 이양했고, 이에 따라 수많은 정치적, 행정적, 경제적 제도들이 파시스트 체제로부터 전후 시대로 그대로 넘어왔다. 둘째, 전후 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의사결정 대부분이 권력을 계승한 파시스트 군주 정부와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반대편 지도자들 사이의 협상을 통해 이뤄졌다. 경제적으로 뒤처지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남부 이탈리아는 가장 먼저 해방되었다. 더욱 급속한 산업화를 거친 북쪽 중심부에서 일어난 전투적 레지스탕스 운동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해방을 쟁취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새로운 체제의 주요 골격은 결정돼 있었다. 셋째, 이런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새로운 노동조합 구조가 위로부터 형성되었다. 1944년 6월 ‘로마협약’(pact of Rome)에서 이전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가톨릭노조 대표자들은 새로운 노조조직인 CGIL(Confederazione Generale Italiana del Lavoro이탈리아 노동총연맹)을 설립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CGIL의 인위적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냉전의 긴장은 이탈리아의 내부 분열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이 분열은 의회 집권세력인 데 가스페리(de Gasperi)가 이끄는 새로 설립된 기독교민주당(DC)과 강력한 야당 지위를 지닌 공산당(PCI)이 연립정권을 구성한 짧은 기간 이후에 나타났다. 몇년 지나지 않아 CGIL은 두 개의 노조로 분열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분열은 노동을 정치적으로 그리고 작업장 수준에서 약화시켰고, 이에 따라 메이저(중소 사용자를 포함해) 사용자들은 노조 활동가들을 탄압하고 작업장에서 사실상 일방적인 독재를 행사했다.
그 뒤에 전개되는 역사의 대부분은 경쟁하는 노조 조직들이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나중에 보이는, 노동조합의 어렵고 불완전한 조직 재정립은 지배적인 노동조합인 CGIL 내부에서 더욱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CGIL이 전투적인 계급 투쟁의 수단으로서의 자신을 규정한 것은 1970년대 PCI가 수용한 ‘역사적 타협으로 인해 일정하게 훼손되었다. 당시 타협은 사실상 극단주의자들의 위협에 맞서 노동조합이 사회적 정치적 질서의 수호자로 행동하는 책임을 부여받았음을 뜻했다. 이렇듯 사회통합의 매개체로 규정된 노조 정체성은 1980년대 경제 위기 및 1990년대 정치적 위기를 겪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탈리아 노동조합주의는 계급과 정치 사회적 통합과의 긴장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이 갈수록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에 따라 노동시장 행위자로서의 노동조합의 역할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만큼 노동운동은 혼돈이 불가피했다.
통합과 분열
이탈리아 노동조합운동의 동학은 정치적 통일과 균열의 복잡한 패턴에 따라 형성돼 왔다. 그 한 축은 전통적으로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고 경제적, 사회적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이 지배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온 카톨릭 교회와 주요 공적 제도(대표적으로 교육 시스템)와 관련해 세속적 기반을 주장하면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추구하는 세력 사이의 긴장이었다. 이탈리아 국가는 1860년대 세속화의 원칙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 원칙은 세기가 바뀌면서 수정되었고 1929년 무솔리니의 악명높은 바티칸과의 ‘종교협약으로 또 다시 수정되었다. 종교협약은 전후 시대에 정치적 폭발력을 지닌 것으로 판명된 특권을 허용한 것이었다. 긴장의 또 다른 한 축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균열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두 정파 사이의 균열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 PSI(이탈리아 사회당)는 전쟁 중인 이탈리아에서 다수의 사회주의 정당 가운데 유일하게 1914-18년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고, 전후 혼란기에 혁명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열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1922년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은 공산주의자와 개혁주의자 사이의 대립이 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에서보다 격화돼 양쪽의 적대감이 절정에 달하기 이전에 이뤄졌다. 그리고 1934년 PSI와 PCI사이의 공식 통합협정이 맺어졌다. 이 협정으로 반 파시스트 공동투쟁이라는 효과적인 기초가 마련되었다(Kendall,1975:149). 전후 PSI 다수파는 유럽의 다른 사회주의 정당에 비해 공산주의자와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적극적 지향을 더욱 강화했으며, 이는 결국 나중에 노조의 분열과 파편화를 낳은 요인이 됐다.
CGIL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산물이었다. 즉 전후 노조 재건에 대한 합의 과정에서 각각 세 가지 주요 정치적 지향을 보이던 세력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던 바가 CGIL로 표현된 것이다. 이런 통합은 데 가스페리의 첫 DC(기독교민주당)-주도 정부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각료의 참여라는 점과 맥락을 같이하는데, 이러한 통합도 정당 정치의 균열이 다시 나타난 이후에는 유지될 수 없었다.
이런 분열은 국내외 압력이 겹치면서 나타났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해방투쟁의 마지막 국면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은 강력하고 급진적인 반란 세력의 양상을 띠고 전개됐다. 데 가스페리 정권 하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연합은 현장의 전투성을 포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자 PCI 지도부가(스탈린의 국가적 필요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협력하려고 했던 전략이었다. 일단 질서가 회복되자 데 가스페리는 더 이상 그의 정치적 하위파트너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1947년 5월에 구성된 새로운 정부로부터 그들을 배제시켰다. 기독교민주당의 정치적 야심은 미국의 외교정책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미 국무성은 데 가스페리 정부에 대해 PCI가 정치적으로 주변부로 밀려나고, 공산주의자들이 거의 수용할 수 없는 긴축 조처를 채택해야만 경제적 지원을 해주겠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는 몇 주 이내에 지원은 새롭게 천명된 마샬 플랜의 틀에 따라 이뤄졌다(Romero, 1992:139-41).
CGIL의 분열은 이러한 정치적 프로젝트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1948년 세계노조연맹(WFTU)의 분열 그리고 이듬해에 출범한 국제자유노련(ICFTU)의 형성과 맥락을 같이했다. 미국 노조 활동가들의 체계적 개입(특히 AFL 대표인 Lovestone과 Brown)은 1948년 4월의 선거 패배로 동일한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는 국내적 압력이 커가던 때에 오히려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정파 분리를 촉진시켰다. CGIL과 같은 시기에 태동한 이른바 ‘교육운동’(ACLI)의 영역 내에서 밀접하게 조직된 가톨릭 분파는(Bedani,1995:18; Pasture,1994:73) 노동운동의 파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부, 미국 노동운동가 그리고 바티칸과 밀접하게 접촉했다. 이런 분열의 구실을 제공한 사태는 1948년 7월에 일어났다. 이 때는 DC정부가 선거에서 압도적 차이로 승리한 직후였는데, 당시 공산주의자 리더인 Palmiro Togliatti에 대한 암살시도가 자발적인 파업 물결을 촉발시켰고, 사회주의자와 급진파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더 나은 파업 통제를 약속했다(Horowitz,1963:215-16)
ACLI의 목표는 광범한 비공산주의자 연합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목표에 따라 ‘자유’CGIL(LGCIL)이 1948년 10월에 설립됐다. 그러나 이렇게 추진된 동맹도 CGIL로부터의 갑작스런 이탈을 거부했는데, 미국 노동운동가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 가톨릭 정서는 반공산주의만큼 강했다. 결국 1949년 5월 공화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일부 ‘자율주의’(autonomist) 사회주의자들은 결국 CGIL을 포기했고, 여기서 떨어져 나온 대다수는 새로운 연합인 FIL(Horowitz,1963:220-2)을 창립했다. 1950년대 초 FIL 대의원 대다수는 LCGIL과의 통합을 승인했으나 1950년 3월에 심각한 분파주의가 일어났고 이에 따라 일부가 UIL(Unione Italiana del Lavoro 이탈리아 노동연합)을 구성했다. 두 달 뒤에 LCGIL과 FIL의 잔류 조직은 함께 CISL(Confederazione Italiana dei Sindacati Lavoratori 이탈리아 노동조합연합)을 조직했다(Romero,1992:ch.5). 이 조직의 이름은 나름대로 의미가 크다. 노조의 연합체로서 CISL은 CGIL의 거대한 중앙집중화와 반대로 부문 조직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했다. 이는 노동운동이 점차 정치적 경향에서 경제적 경향으로 이행하는 것을 뜻했다. CGIL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소수의 좌파 사회주의자들까지 포함하는 가장 거대한 연합체로서 쉽게 유지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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