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인재경영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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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의 인재경영에 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인재전쟁(War for Talent)이라는 키워드는 모든 경영자에게 핵심화두가 된 지 오래이다. 직원들이 보유한 지식과 창의력이 곧바로 경쟁력의 척도가 되는 지식사회에서 최고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인재전쟁’이라는 키워드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증요한 사실이다.
‘한 명의 인재가 만 명의 임직원을 먹여 살리는 시대’라는 빌 게이츠의 말처럼 ‘인재’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지만, 기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인재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인재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등 인재 확보에 있어 매우 절박한 현실을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기업들이 ‘인재전쟁’ 있어 손쉽게 접근하는 전략이 채용, 스카우트 등의 인재 확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적합한 인재의 확보는 기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Good to Great’의 저자 짐 콜린스의 말대로 적합한 사람을 버스에 태워야 하는 것은 매우 자명한 일이지만, 우리 기업들 대부분이 이 부분에만 집중한 나머지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항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교육’, 즉 인재육성이라는 부분이며 ‘인재 육성’의 전략은 ‘인재 확보’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가시적인 성과 역시 더디게 보여 지는 경향이 있어 이 부분에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과거의 우리 역사에서 인재경영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사람을 꼽으라면 언제나 1순위에 뽑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세종대왕이다.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로 넘어가는 가교를 세운 사람이 태조와 태종이라면, 그 다리를 건너 500년 왕조와 굳건한 토대를 세운 것은 바로 세종대왕! 그는 과학과 농법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정리하고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인 한글까지 만들어냈다. 이는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뛰어난 인재를 얼마나 많이 모아 그들의 능력을 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단순히 왕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그는 필요에 따라 적절히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세종대왕 자신도 뛰어난 지식인이었지만, 그보다 그는 인재 경영에서 매우 뛰어난 리더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보고서는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서부터 세종대왕의 인재경영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들과 어떠한 인재들이 세종대왕과 함께 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현재의 우리가 어떠한 점을 배워야하는지 작성하였다.
Ⅱ. 본론
1.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조선시대의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를 통해 국가운영에 참여할 관료들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문과는 문신 관료, 무과는 군사 지휘관들을 뽑는 시험으로, 이를 통과한 사람들이 양반 관료가 되었으며, 조선 시대 관료제를 주도하였다. 이에 비해 잡과는 통역관, 의사, 법률가 등 주로 행정 실무자나 전문직을 뽑는 시험으로, 보통 중인 계층의 사람들이 지원하였다. 중인들은 양반들로부터 차별을 받았으며 잡과 역시 문과와 무과에 비해 무시되었다. 이 외에 특정한 기예를 밑천으로 관료제에 참여하는 천민들도 있었는데, 화가, 음악가, 요리사, 기술자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양반과 중인들에게 철저히 무시되었고, 직책도 잡직으로 분류되었다. 왕은 잡과나 잡직을 뽑는 데는 참여하지 않았고 양반 관료의 선발에만 적극 개입하였다.
양반 관료를 선발하는 문과와 무과는 대거라고 하여 동시에 시행되었다. 모두 3차의 시험을 거쳤는데, 이 중 1차를 초시, 2차를 회시, 최종 3차 시험을 전시라 하였다. 전시는 왕의 참석 하에 대궐 정전에서 시행하는 시험이란 의미로, 전시를 통해 문과와 무과 합격자들을 최종적으로 뽑는 사람이 바로 왕이다.
문과의 1차 시험에는 각 지방별로 실시하는 향시, 한양에서 시행하는 한성시, 성균관의 관시가 있었다. 합격 인원은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경국대전에는 330명으로 되어 있다. 330명을 한양에 모아 2차 시험인 회시를 치러 33명을 선발하였는데, 33명 숫자 역시 불교의 33천에서 유래하였다.
무과의 1차 시험도 각 지역에서 시행하는 향시와 훈련원에서 시행하는 원시로 나뉘었다. 무과는 많을 때는 만 명씩 뽑아 만과라고도 하였으나, 조선 전기 식년시의 무과 1차 합격자는 190명이었다. 이들은 한양에서 시행하는 2차 시험에 응시하였고, 이 중 28명이 선발되었다. 이 숫자는 하늘을 지키는 28개의 별자리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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