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

 1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
 2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2
 3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3
 4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4
 5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5
 6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6
 7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7
 8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8
 9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9
 10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0
 11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1
 12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2
 13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3
 14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4
 15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5
 16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6
 17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7
 18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8
 19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19
 20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2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조선시대사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생애
1). 흥선대원군
2). 명성황후

2. 시대적 상황

3.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내정책
1). 흥성대원군의 대내정책
2). 명성황후의 대내정책

4.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외정책
1). 흥선대원군과 대외정책(쇄국정책)
2). 명성황후의 대외정책

5. 주요 사건과 국내의 대응
1). 임오군란과 국내의 대응
2). 갑신정변과 국내의 대응
3). 갑오개혁과 국내의 대응

6. 기존 매체에서의 인물평가와 재해석

7.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개혁과 한계
1).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개혁과 한계
2). 명성황후의 개혁과 그 한계

8. 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하여
1). 시작하기 전에
2). 애국과 권력
3). 격동의 시대
4). 외세와 조선

9.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를 바라보는 자세
1). 명성황후와 대원군 그리고 권력
2). 격동의 시대속의 권력자들



참고자료
본문내용
1)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자는 시백, 호는 석파이다. 그는 순조 20년(1820) 남연군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12살에 어머니를 잃고 17살에 아버지를 잃은 후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적막한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는 21세 되던 헌종 7년(1841)흥선정이 되고 2년 후에는 흥선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헌종 12년(1846)에는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종친부의 실무를 맡은 유사당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난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이 직책과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 한직을 전전하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1863년 12월 초 철종이 사망하자 마침내 흥선대원군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하지만 고종이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법에 따라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이는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이 대원군에 올라 운현궁에서 국정 전반의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른바 섭정의 지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백성들이 가장 신뢰하던 정치인이었다.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에 끌려가 3년 뒤 환국했을 때에는 대원군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서울시민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대외적으로 강경한 쇄국론자였던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 때 외세에 단호하게 맞섰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 직후 한 달간 그리고 1894년 동학란 때에도 네 달 동안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도 하였다. 하지만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3년 후 1898년 세상을 뜨게 된다.
참고문헌
한영우, 2001 [명성황후와 대한제국]효형출판
이성무, 1998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
이덕일, 이희근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세종서적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허중권, 바로보는 한국 근현대사, 학연문화사
이영철, 한국사총론(하), 고시연구사
김윤수, 탐구한국사
김윤곤, 1999, 대원군의 쇄국주의 정책론, 한국행정사학지
신주연, 1999, 대원군의 개혁정책성향, 선명대학교 교육대학원
김형수, 2001, 고종의 친정과 개국정책연구, 이대사학회
양주연. 1998,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그 인식의 변화,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조활 , 1995, 한국논단
신국주, 1998, 명성황후살해사건에 대한 재평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유국현, 1994, 대원군의 개혁정책에 관한 연구
성대경, 1984, 대원군 정권의 정책
http://www.rivalry.co.kr/V1/View/?num=26
http://hisedu.x-y.net/modern-class-1.htm
http://www-2.knu.ac.kr/~history/study/dapsa/9901/9901-07.htm
http://guno.pe.kr/03classdata/classdata7_4.htm
http://members.tripod.lycos.co.kr/ejjin/mung.htm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