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발전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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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경제발전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요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제4장 한국경제발전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요인(1-7절)
제1절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독립국가:
중국 다음의 일본과 공동 2위
가. 근대화의 시점(始點)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독립국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발명과 인구의 증가와 농업생산이 증가하는 등 경제적 변화도 많았다. 그러나 근대화(modernization)를 맞이하면서 전통사회(傳統社會)(traditional society)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한국이 언제 근대화를 시작하였느냐는 그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아이젠슈타트(S.M.Eisenstadt)가 「근대화-저항과 변화애서 밝힌 바와 같이, 사회경제 및 정치제도가 서구 선진국 식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1876년 개항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한국이 시장경제로 이행한 시점을 갑년경장(甲年更張)(1894년)으로 잡으면 한국의 근대화는 1890년대 중반, 쿠즈네츠(Simon Kuznets)의 현대경제성장(modern economic growth)의 개념을 기준으로 한다면 6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슨 교수는 [한국의 경제사회적 근대화]에서 근대화사회란 변화가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사회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 기준으로 보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근대화가 시작되고 자본주의경제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6.25동란이 끝난 1953년부터 라고 할 수 있다.
나. 전통사회의 특성
한국의 전통사회는 양반(兩班), 상민(常民) 및 천인(賤人)으로 구성된 계급사회였다.
양반은 조선사회의 지배층인 사대부계층을 부르는 사회적 용어였으며, 문관관료 담당층인 문관과 무관직 종사자인 무관은 구별이 있었다. 양반은 관료로의 영달이 약속된 신분층이나, 고려시대와 달리 과거를 거쳐야만 관료로 등용되는 것이 원칙이고, 가문의 후광으로 특별기용되는 음서(蔭敍)의 길은 매우 좁았다. 관료로 서임되면 국가로부터 토지와 녹봉을 받아 부귀를 누리고 사회적으로 행세하는 길이 열렸다. 양반은 평소에 독서와 학문에 힘써 유교교양을 쌓은 후 과거시험을 보게 된다. 양반의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양반의 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과거를 거쳐 관료로 나갈 관직에는 큰 변화가 없었기에, 실지로 관료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양반이 차차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양반 가운데 중앙지배체제하에서 벗어난 자들을 향반(鄕班)이라 하였다. 향반은 농촌사회에 거주하면서 지방 토호(土豪)로 행세했다. 성리철학의 영향으로, 양반사회에서도 적·서(嫡庶)의 차대가 엄격하여 서얼은 관직에 올라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중인은 양반과 상인의 중간계층으로, 기술직과 하급관리와 군의 사관층인 군교(軍校) 등 조선지배체제의 실무담당신분이었다. 이들은 역관(譯官)·의관(醫官)·율관(律官)·산원(算員)·화원(畵員)·관상감원(觀象監員)·사자원(寫字員) 등으로 기술직을 담당하였다. 중인의 신분과 직무는 세습되는 것이나, 기술관직 담당자는 잡과(雜科)라는 과거에 합격하여야 실무를 담당할 수 있었다.
대다수의 국민은 상민(상인이라고도 함.)이라 불리는 계층이었다. 국가에서 토지를 분급받지 못했으나 토지제도의 변동에 따라 차차로 자작농, 자작겸 소작농과 소작농의 구분이 생겨났다. 상민도 양인층(良人層)에 속하기에 과거응시의 길이 열려 있었으나, 경제적·사회적 여건상 그들의 사회진출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권리보다는 의무만을 지고 있는 피지배계층이었다. 이들은 토지에 부과되는 전세(田稅)와 군역의 의무인 역(役)과 지방특산물을 받쳐야 하는 공(貢)의 무거운 부담을 수행하여야 하는 고달픈 생활을 강요당하던 신분층이었다.
조선시대 최하의 신분층은 천인이었다. 천인계층의 대다수는 왕실이나 국가기관에 예속된 공노비(公奴婢)와 사가(私家)에 예속된 사노비(私奴婢)였다. 이들은 재산으로 간주되어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부자유민이었으며, 대부분을 관아나 상전의 토지에 묶여 있으면서 농사에 종사했다. 천민에는 노비 이외도 재인(才人)·백정(白丁)·무당(巫堂)·창기(娼妓)가 있었으며, 이들은 특수마을을 이루고 살며 천직(賤職)에 종사하였다.
전통사회인 조선사회의 경제적 특성은 아래와 같이 분류할수 있다.
1. 사중심사회(社中心社會) 인 조선사회에서는 지도층이 농.공.상 관계 직업을 기피하였으므로 자연 이들 경제활동은 극히 침체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북학파의 유수원은 사·농·공·상을 전문화시키고 무위도식하는 양반들을 농·공·상으로 전업 할것을 주장하였다.
유수원(1694-1755) : 북학파의 선구자 역할, 상공업 진흥을 위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화 전문화 실현과 상인 간의 합자를 통한 경영 규모의 확대 및 상인이 생산자를 고용하여 생산과 판매를 주관 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서] 저술
- 중국과 우리를 비교
- 다방면의 개혁안을 제시함
유수원은 자신의 저서 우서(迂書)에서 국허민빈(國虛民貧) 원인과 대안 제시하였다.
(1)농·공·상을 전문화시키고 무위도식하는 양반들을 농·공·상으로 전업주장.
(2)공업의 발달을 국부의 원천으로 삼을 것 주장.
(3)공업진흥방안으로 상인간의 합자를 통한 경영규모확대와 상인이 생산자를 고용해 생산과 판매를 주관할 것을 제안, 대(大)상인이 지역사회 건설에 주도적 참여주장.
(4) 지소유 불공평 개혁(토지개혁)을 통한 소득분배문제 보다는 영농기술 혁신 등
농가의 생산력·소득의 증대에 관심을 보였다.
- 자료 글 : 상공업을 두고 말단적인 직업이라 하지만 본래 부정하거나 비루한 직업은 아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물품 교역에 종사하면서 남에게서 얻지 않고 자기 힘으로 먹고 사는 것인데, 그것이 어찌 천하거나 더러운 일이겠는가. [ 유수원 우서 ]
2. 동아시아 3국 중 중국은 실크로드 등을 통하여 서방과 무역을 많이 하였고 일본도 서구인들과 일찍부터 접촉하고 무역도 많이 하였으나 오로지 한국만은 그렇지 못했다.
조선사회의 경제는 거의 폐쇄경제(closed economy)였으므로 국제무역은 보잘 것 없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당시 조선이 근대화로 나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상당한 역사적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서양은 산업화를 거쳐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조선은 서양의 발달한 학문과 기술을 무시하고 현재에 안주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서양에 의한 조선의 자원 침탈과 경제 침탈, 정치적 무시로까지 이어졌다.
1876년에 드디어 공식 개방되었으나 때는 이미 너무나 늦었던 것이다. 일본이 기회를 엿보다가 1910년에 드디어 35년간의 식민통치를 시작하는 공식적인 절차를 통하여 한국을 병합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3. 경제변동은 주경제활동이 농업이었으므로 기후나 병충해 등에 영향을 많이 받아 크게 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임진왜란이후에는 농토가 심하게 피폐해졌을 것 이다.
임진왜란 전에는 농지 면적이 170만 결에 달했으나 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54만결로 줄어, 그만큼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하였습니다. 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어 인구가 줄고 가옥과 재산의 손실도 막대하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심이 흉흉하여 이몽학의 난과 같은 반란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 군량을 모으기 위해 발행한 공명첩은 조선 왕조의 신분 제도를 붕괴시키는 데 한몫을 하였습니다.또한 난후 전염병이 돌자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명의 군사 원조를 받아 숭명 사상이 더욱 강화되어 훗날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초래하는 한 이유가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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