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교육과 그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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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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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우리 사회 대안교육운동은 시기적으로는 1995년 5월 31일 발표된 ‘교육개혁안’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문화적 공세에 대한 교육적 대응으로서 시작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과거 이 땅의 교육을 민주화하기 위한 개별적, 혹은 집단적인 다양한 교육실천과 교육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아울러 동시대적으로는, 문명사적 변혁기에 대안적 가치에 기초한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의 변혁을 통해서 현대사회 위기에 대응한다는, 그리고 세계적으로 힘을 얻어 가는 ‘대안운동’의 정신과 철학을 공유하고 동참한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또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사회적 약자의 삶은 더욱 불안해지는 경제의 세계화 시대에 작은, 개별적인 ‘꿈’들을 모아서 구체적인 현실로 변화시키는, 교육을 통해서 ‘희망’을 만들고 나누는 ‘진지(陣地)’를 구축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디딤돌로서의 역할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목적인 것이다.
위기의 시대와 대안교육의 필요성
매우 당연한 말이겠지만, 일반적으로 교육은 시대가 변하면 최우선의 개혁 대상이 된다. 흔히 사람들은 교육이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교육을 통한 사회변혁이 성공했다는 소리를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거꾸로 교육이 변화된 세상에 사람들을 적응시키는 역할을 해 온 예는 많다. 법 논리상으로는 만인은 평등하다지만, 실제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남보다 강한 힘을 행사하는 소수는 늘 존재했으며, 특히 세계화된 경제체제에서는 초국적기업은 국경을 넘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계화된 경제질서 하에서는 대부분의 교육자들은 사회변혁의 주축이 아니며,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좀더 구체적으로는 자본이 요구하는 것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시대 변화의 고비마다 교육개혁 요구와 그것을 추동(推動)하는 힘의 중심은 교육계 ‘안’보다는 ‘밖’에 있어왔던 것이다.
1995년의 ‘531 교육개혁안’도 마찬가지다. 전후 시기부터 산업화시기 동안 추진되었던 교육개혁안들의 ‘존재 이유’가 그리 ‘교육적’이지 않았듯이, 세계화시대에 부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531 교육개혁안’도 교육계 내부의 요구로 시발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문민정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내외의 초국적기업, 대기업의 기업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생산방식에 기초한 산업화시대에 기업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인간형은 ‘숙련된 노동자’였다. 그래서 학교는 소위 ‘선진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고, 이에 따라서 교실구조도 토론식 수업에 적합한 자리 배열보다는 지식의 일방적 전달이 가장 용이할 수 있는 일렬종대(一列縱隊)식 배열로 획일화되었던 것이며, 학교의 역할이라고는 학생이 주입된 지식을 얼마나 잘 외우고 있는지를 검사해서 등급을 매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대량생산을 통해서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인 이윤 창출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한편으로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부단히 기업이 원하는 인위적인 욕구를 창출해 내고, 또 한편으로는 다양한 욕구에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즉,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특정 분야에서의 ‘숙련도’보다는 ‘유연한 전문성’이 기업에게는 더 절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연한 전문성을 갖춘 ‘인적(人的) 자원’을 공급받아 생산에 투여해야 하는 자본가, 기업가의 입장에서 학교를 보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여전히 산업화시대에나 써먹을 수 있는, 기술 활용에서의 순발력과 융통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숙련공’ 생산을 그대로 목표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세계화’라는 담론이 사회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과 때를 맞춰 누구보다도 먼저 기업 회장들이 우리 교육의 경쟁력 없음을 불만하기 시작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육운영에 ‘시장 논리’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531 교육개혁안’이 나오게 된다. ‘531 교육개혁안’은 분명 교사나 학생, 학부모와 같은, 교육의 직접 당사자 ‘안’으로부터가 아닌, ‘밖’에서 먼저 주장되었고, 성격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다수를 위한 ‘공공성’보다는 소수의 경쟁력 향상을 우선시하고 있다.
그런데 ‘531 교육개혁안’과 그 이후에 나온 일련의 교육개혁안들이 교육현장에 몰고 온 파장은 매우 거세다. 열린교육이 주창되고 학교운영위원회가 생겨났으며, 자립형 사립고와 대안학교 건립이 가능해졌고, 교육과정 구성에서도 재량교과 영역이 대폭 늘어났다. 그리고 학생의 학교선택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고교평준화 정책을 도마 위에 올랐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울시 교육청은 “교사가 학습목표와 학습내용을 제시하면 학생이 학습계획을 짜 학습자료와 방법을 결정하고, 공부할 장소도 스스로 찾아가 교실복도도서관자료실멀티미디어실 등 학교 전체를 교실처럼 이용할 수 있도록 적극 권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 ‘2003년도 교실수업 개선 및 지원 종합계획’을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두르면 대개 그렇듯이 우리 교육개혁은 한마디로 두서가 없어서 일반인은 물론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변화를 따라잡기가 매우 버거운 실정이다. 학교운영위원회가 심의결정기구와 단순한 자문기구의 위치를 오락가락하고 있고, 한동안 말 꺼내기가 무서웠던 교원노조를 이제는 사용자도 가입할 수 있게 해놨다든지 하는 것들, 교원 정년도 정책 입안자의 기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같고, 한편으로는 창의성교육, 인성교육, 열린교육 하라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학교 규모가 작으면 통폐합하고 있으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공급자와 수요자 관계로 둔갑시켰고, 교육을 ‘인간이라는 자원’을 개발하는 수단 정도로 전락시키는 등 ‘531 교육개혁안이후 진행되어 온 일련의 개혁조처들이 도대체 우리 교육을 어디로 몰고 가고 있는지 매우 혼란스럽다. 특히 우리처럼 민주적인 의사결정의 경험이 미천하고,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그에 따른 책임의 조화를 경험하기 힘든 교실상황에서, 그리고 교사도 부모도, 그리고 이러한 계획을 입안한 당사자조차도 그런 수업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이 그들이 계획한대로 ‘학습도움센터’를 찾을 것인지, 아니면 곧장 사설학원으로 가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꼭 실험을 해봐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인지 매우 안타깝기만 하다.
물론 ‘학습도움센터’ 취지라든지, 그 이전의 열린교육이나 창의성교육과 같은 것들은 그 자체만 보면 교육철학적으로 바람직하기에 정당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들이 나오게 된 배경이나 그러한 교육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531 교육개혁안이후의 후속적인 교육개혁안들은 겉으로 표명된 목표가 무엇이든지 간에, 기본적으로 개인보다는 사회, 더 정확히는 자본의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하며, 다수보다는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소수의 경쟁력 고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갖게 되는 일자리가 실로 다양하며, 그 중에서 절대 다수의 것들이 유창한 영어회화 실력을 요구하지 않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실용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의무교육 단계의 핵심적 목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우리 국민 모두가 영어 사용에 불편이 없게 만들겠다는 교육목표는 분명 우리 아이들 개개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또한 밑도 끝도 없이 불거져 나온 창의성교육도 전인교육 철학에 근거한 것이 아닌, ‘유연한 전문성’을 위한 것으로서, 달걀을 깨뜨려서 세웠던 콜럼버스의 그 무지막지한 ‘반(反)생명적’ 창의성과 본질적으로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초등학교의 교육목표를 바꾸지 않은 채 교육방법만을 도서관이나 자료실, 멀티미디어실, 혹은 집에서 개인 컴퓨터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바꾼다면, 그러한 교육환경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아이는 창의적 학습능력보다는 가정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문화자본과 사회적 자본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소수뿐이다.
성찰하며 반성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지금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매우 위험스런 시대임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경기가 침체되고 있고 실업자가 늘고 있으며, 생태계가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고, 전쟁과 테러로 인한 고통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으며, 핵전쟁이나 핵사고의 위험 또한 증폭되고 있고, 빈곤과 기근이 확산되고 있다. 한마디로 세계 구석구석이 점증되는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고통과 위기가 생겨난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현대문명이다. 현대문명이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기계적 세계관, 다른 생명체에 대한 인간중심주의, 생산력주의, 성장주의, 경쟁이데올로기 등으로 성격 지워지는 현대 산업문명이 지구촌 사람들을 ‘풍요와 소비’라는 자멸적 꿈을 쫓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대중매체 등이 부단히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상대적 결핍과 불필요한 욕구’를 갖게 함으로써, 자원과 물질을 엄청나게 낭비하는 생활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그 결과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수많은 생명체가 멸종되고 있으며,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있고, 한쪽에서는 과잉영양으로, 또 한쪽에서는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물론 과학기술을 과신하는 사람은 이는 단지 시간문제로서 과학기술의 발달로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그러나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게놈지도가 막상 완성되고 보니 처음 기대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결과가 나왔다. 즉, 생명의 신비는 여전히 과학기술이 닿는 곳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서 특히 우려되는 점은 최근 인간복제를 실제로 실험한 종교집단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생명공학의 연구방향이 돈 되는 쪽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현대 문명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는가? 예를 들어, 현대 문명의 소비주의적 속성이 어떻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지 생각해보자. 현대 문명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해서 문명권(文明圈)에 속해있는 사람에게 풍요로운 소비를
참고문헌
4. 참고문헌
○ 이종태. 『대안교육과 대안학교』, 서울: 민들레, 2001
○ 이한. 『학교를 넘어서』, 서울: 민들레, 1998
○ 권기욱. 『열린 교육의 이해』, 대구: 대구대학교출판부, 1999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참교육실천위원회, 『학교붕괴』, 서울: 푸른나무, 1999
○ 교육부. 『교육50년사:1948-1998』, p.422-440. 1999
○ 가와카미 료이치. 『변해버린 아이들 무너지는 학교』, 서울: 조선일보사, 1999
○ 김창회. 『무너지는 교육 침묵하는 학교』, 서울: 코마콤, 1996
○ 이돈희. 『교육이 변해야 미래가 보인다』, 서울: 현대문학,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