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

 1  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1
 2  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2
 3  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3
 4  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4
 5  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5
 6  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6
 7  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7
 8  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실천 신학교 회의 신앙교육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교회 교육목회를 생각하면서 과연 우리의 기독교 교육과 일반 교육, 기독교 교육과 신학의 관계성과 연계성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굳건한 기독교사상이 필요 하다. 물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 한 것이지만 그 믿음을 실천하는 데 올바른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의 사상이 중요 하다. 그것을 올바른 눈으로 제시하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 할 수 있는 것은 목회자의 몫인 것이다. [21 세기 실천신학개론]에서 나타난 지난 세기 한국교회 성장에 나타난 문제 성중 목회관에 나타난 문제를 들어 나타내었다. 교회성장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한다. 교회성장을 목회자들은 대부분 수적 성장을 중심으로 한 교세 확장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교회 성장을 어떤 의미에서 개교회적으로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나고 교회에 속하는 자산이 늘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성장이란 말은 물량적인 것과 교회의 성숙한 모습신앙의 성숙, 이웃과 세상을 향한 말씀의 실천하는 모습 이면서 공동체의 모습이다.
오늘날 교회는 기업 경영적 가치관이 지배 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실적주의 , 물량주의 등이 지배 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 지도자인 목회자의 신앙관 내지는 목회관이 뚜렷해야 한다. 요즈음 곳곳에서 열리는 성회가 물질 건강 출세 만사형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르치신팔복의 내용이 결코 수복이나 재복의 내용이 아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하신 교육적인 사역들을 우리는 기억 하고 이어가고 배워야 한다. 목회자는 지도자들과 팀웍을 이루어 일해야 하지만 , 그의 목회를 교육적 차원에서 총괄해야 한다. 목사의 전체 직무를 통하여 교육에 참여하게 되고, 직적 교사가 되며, 행정적인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적이고, 의식주의 적인 교회 교육을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의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50년 60년대를 거치면서 70년대의 john H. westerhoffⅢ 가 있던 세대에도 기독교교육과 그를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문제가 있었다.
그의 저서 [교회의 신앙교육]에서 말한 흔들리는 터전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날 주요한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교회에서 기독교교육이 어딘가 건전한 활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말한다. 종교교육을 종래와는 다른 방향으로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 해 졌으며, 다지 교회 교육 프로그램을 바꾸는 것을 도모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 하며, 이미 해결되었다고 여겨왔던 일들부터 점검해야 한다. 인간을 키운다는 전체적인 양육을 오직 학교 교육이나 주입식 교육으로 밖에 이해 할 수 없는 근시안 적인 교육이론이나 통합적인 관점을 결핍하고 있는 애매모호한 신학사상이 종교교육의 미래를 개척하고 적절한 방향설정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야 말로 혁명적인 방향전환이 불가피한 그러한 교회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와 맞부딪쳐 있는 것이다. 이문제의 발단을 살펴 본다면 공교육의 대두로 인한 교회교육의 외면이다. 어린이들의 발달이해나 새로운 교육학을 도입한 공립학교의 교육제도에 매혹되어 주일학교를 골칫거리로 취급했다. 아마도 그들은 학교답지 않은 주일학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무용지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1903년 종교교교육협회를 창립하고, 일반교육에 어떻게 종교교육을 조립해 넣을 것인가를 고민 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만인의 것이 었던 주일학교가 이제는 전문가의 손에 위탁되어 학교일반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고 급기야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아래 종교교육은 교회가 근대교육학의 지시에 따라 어린이 청년 성의 각 연령층 사람들에게 베푸는 학교 형태의 교육과 전적으로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점차적으로 종교교육 운동의 신학적 기초가 비판의 표적이 되면서 1940년대 후반으로 50년대에 걸쳐서 개신교의 주요 교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학적으로 이른바 신정통주의신학의 입장을 받아들여 용어도 종교교육이라는 것에서 기독교교육아런 명칭을 사용하였다. 1960년대에는 기독교교육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심화 하고 갱신하기 위해 한 무리의 연구가들이 주장의 소리를 높여 적지 않은 공헌을 남겼다. 70년대 이후에도 기독교교육의 상황도 신 정통주의의 압도적 영향아래 있었다는 점에서 변함이 없고, 지금의 교회도 그 이상을 기대 할 수 없다. westerhoffⅢ는 기독교교육의 기초가 심하게 흔들이고 있음을 확신한다. 어떠한 일말의 개선책으로도 이일을 뒤 집어 놓을 수 없다. 오히려 다 멈추고 재 출발하는 것이 필요 하다. 기독교 교육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학교 수업이라는 학교형 교육의 규범을 추종해 왔다. 하짐나 한 때 어느 시기에 유효하고 적절했던 한 모델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여 버리고 나면 어느 사이 엔가 벌써 확실한 눈을 상실하고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다른 가능성을 추구해 가는 일을 정지해 버림으로써 자기 빈곤화를 가져 온다. 이는 무제의 사정거리는 매우 좁고 한정되어 있어서 특수한 문제영역 밖에 취급치 못하게 되어 버린다. 플라토에 의하면 교육의 주체는 인간의 공동체 그 자체 여서 학교형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과는 달리 자연스럽고 오히려 비조직적인 힘이 움직여서 사람들을 가화시키는 그러한 교육이라야 본래적인 교육이라고 보았다. 20세기 사람 듀이의 신념도 처음에는 인간의 전생애가 교육의 과정이어서 학교에 있어서의 지적인 교수는 교육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엇다. 만년에 와서 그는 도시화 현상과 기술 혁신에 직면하여 미국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교육을 검토한 결과, 종래의 가정, 교회 지역 사회라는 공동체를 장으로 하는 교육이 이제는 이미 시대에 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어,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학교 교육론자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그후, 미국의 교육은 대체로 학교 조직의 정비와 교수법의 개선을 두 주축으로 삼아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미있는 일에 이르는 노력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모양으로나 범례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실천을 뒷바침하며 끌어가는 범례라는 것의 본질과 그 한계를 잘 인식치 않는 경우 실제 어떤 이변이 일어나도 그것을 놓치고 마는 위험이 있다. 이 경우, 이변이란 기성적인 틀에는 맞지가 않기에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움직임, 따라서 "준거의 틀" 을 흔들어 놓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기성적인 관념이나 전제라는 것이 실제로 놀랄 만치 우리들의 지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기성 관념은 현상을 긍정하는 데 보수적인 의견 일치를 굳히는 경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만 반대로 그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성이 자명한 경우에도 종전의 이해나 방향을 변혁하는 데는 그것이 큰 저해 요인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 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아무런 의심 없이 학교형의 지식 교수라는 패턴을 답습해 왔기 때문에. 교회의 교육적 사명과 사역을 위협하는 이변이 일어나도 그것을 깨달음이 없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 놓고 마는 것이다.
작은 교회를 나누면서 교회학교의 조직이 교회 회중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독자적인 걸음을 걷게 되면서, 이것이 대규모의 지적으로 세련된 도시 주택가 교회에는 맞지만 그 밖의 이른바 작은 교회들의 필요와 요구에는 합당치 못하다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작은 교회의 교회 학교는 많은 경우 근대적인 교회학교를 지향하면서 좌절되고 병들어 있는 상태에 있다. 여기에서 이른바 학교-교수형 범례에 관한 이변을 인정하게 된다.
기독교적 사회 환경의 붕괴 문제를 다루면서 1970년까지는 이 나라의 "사회 전체" 가 모두 함께 자각적으로 종교교육을 실천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도 동질적이어서 신앙이 다른 경우에는 결혼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같은 환경세계 속에서는 무엇보다도 가정이 가장 자연스런 종교 교육의 자리였으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셈이다. 그리고 당시는 아직 대부분의 공립 학교가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신학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교회의 대부분은 전형적인 지역민 교회로서, 모든 연령층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알고 있었으며, 시종 교제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대중 지향적인 기독교 잡지라는 매체를 들수 있다. 또, 무엇보다도 주일 학교가 이루어 놓은 큰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주일 학교는 교회 공동체의 생활과 밀착된 형태로 축제일을 지키며, 종교적 감동을 함께 체험하고 그같은 방식으로 성서의 셰계 속에 참여함을 입증해 왔음을 뜻한다. 이같이, 학교, 교회, 지역사회 그리고 기독교 잡지나 주일 학교의 프로그램이 서로 연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건전한 종교 교육을 위한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여 왔음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종교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일종의 다원주의가 침투해서 서로 상이한 입장들 사이에 여러 가지 절충과 경합 관계가 발생하여 이제는 교회 공동체라고 해도 단일한 이해나 존재 양식으로 묵어질 수 있는 일 같은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현상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잠재적 커리큘럼을 통하여 오늘날, 전통적 학교형-지식 전수의 범례는 소교회와 대교회 양편의 교육적 필요에 대해 모두 적절성을 결여하고 있다. 교회 교육에 불가결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학교형-지식 교수의 틀속에서 전혀 배제되어 있는 문제 영역이다. 즉, 교회 교육의 전문가들이 이른바 종교적 사회화의 과정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회화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사태와 사항에 직면하여 획득하거나 자기의 삶의 방식을 체득하거나 하는 경우에 작용하는 모든 의도적이고, 무의도적인 영향 관계의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 참 의미에서의 교육은 통학(schooling)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학교형의 교육은 어디까지나 교육의 한 국면에 불과한 것이며, 사회화의 프로세스로서의 교육은 인간의 지식, 태도, 가치관, 행동, 감수성 등 전인적인 발달을 촉진시키는 모든, 의도적이며 동시에 계속적인 노력의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어떻든 교회 교육이 학교형의 교수에 그 범례를 구해서 그것으로 일이 된다고 믿는 한 보다 중요한 것을 상실한 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는 역시 우리의 교육의 자리인 교회 그 자체에 관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