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

 1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1
 2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2
 3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3
 4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4
 5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5
 6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6
 7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7
 8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8
 9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9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정치문화와 시민사회 김영삼 문민정부와 IMF시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경남 거제(巨濟) 출생. 195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의 비서가 되었다.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5·6·7·8 ·9·10·13·14대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9선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사이 민주당 대변인 2번, 민중당 등 야당 원내총무 5번을 역임하고 1974·1979년의 신민당과 1987년의 통일민주당 등 야당총재를 3번 지냈다.
1980년 이후 전두환(全斗煥) 정부에 의해 2년 동안 가택연금되어 정치활동을 못 하였고, 1983년 5월 18일~6월 9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 5공화국하에서의 민주화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김대중(金大中)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신민당 창당을 주도하여 신한당을 와해시켰다.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고 그해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盧泰愚),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金鍾泌)과 통합,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1993년 2월 취임함으로써 32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文民)정부를 출범시켰다. 1994년 마틴루터킹센터가 수여하는 세계적인 인권운동 평화상인 비폭력평화상을 받았으며 1995년 뉴욕에서 열린 국제연합 50주년 기념총회에서 연설하였다.
2. 김영삼 대통령의 업적
1. 금융실명제
김영삼 때 처음으로 정경유착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해결수단으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금융실명제란 계좌를 개설할 때 반드시 실존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해야하며 그 사람의 동의를 얻었다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 이상 본인의 이름으로만 계좌를 만들 수 있는 제도. 이것은 국회에서 반발을 일으켜 통과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김영삼은 이를 긴급명령으로 발동하여 선시행 후 추후 국회에서 추인을 받게 되었다.
2. 하나회 해체
전두환과 노태우의 배경이었던 신군부의 핵심세력이 바로 하나회이다. 이 하나회는 대부분 TK출신의 육사장교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을 거치며 대부분 장성으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조사를 통해 이들을 대부분 자의반 타의반으로 강제퇴역시키고 군부의 물갈이를 단행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융실명제보다 이 하나회 해체를 더 큰 업적으로 꼽는 사람도 있다.
3. 청와대 개방
노태우 전 대통령 때 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청와대 반경 10km 이내 접근이 불가능하였다. 청와대 앞으로는 차도 다닐 수 없어 많은 차들이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정문안쪽을 제외한 청와대의 기존 경비구역을 대폭 축소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차를 타고 청와대 정문 앞을 지날 수 있게 되었다. 구시대 권위주의의 탈피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