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교조선 감리회의 형성 시대의 변천과 교회의 각성 사회주의의 도전과 교회의 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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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교조선 감리회의 형성 시대의 변천과 교회의 각성 사회주의의 도전과 교회의 자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전 민족적인 3.1독립운동에 부딪친 일본 정부는 그들의 통치 전술을 바꾸었다. 곧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꾼 것이다. 일제는 우선 농산물 수탈을 위한 농업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을 지배할 방법이 되는 것이고. 긴요한 일본 국내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을 식량공급 기지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증산을 앞세운 수탈은 농민들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어갔다.
그러면 이러한 식민지 치하의 한국인들을 해방하고 구할 수 있는 이념과 운동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민족주의자들은 문화통치로 생긴 다소의 문화공간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교육함으로써 실력을 양성하는 길을 걸었다. 3.1운동의 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기독교인들은 그로 인해 분산되고 정체된 교회를 다시 수습하고 정비하는데 주력했다. 이때에 제 3의 새로운 이념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사상과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본질상 반종교운동, 반기독교운동을 동반하고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반대한 이유는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앞잡이요 침략의 선봉이라는 것이었다.
기독교계는 이에 응답하는 동시에 이것을 계기로 자신을 반성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정동교회의 주일학교 교장이었던 조병옥박사도 “조선 기독교의 당면한 문제”를 포괄적으로 제시하였다. 첫째는 조선교회의 지위문제이다. 독립된 조선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종교와 과학의 조화문제로 “기독교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과학을 기독교로 조화함이 우리의 의무라 한다.” 셋째는 사회 사조와 운동에 대한 태도문제이다. 기독교는 마땅히 사회 운동에 대해 일정한 견해를 가지고 사회를 이끌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주의의 충격적인 도전을 계기로 교회가 자성하게 된 것은 옳은 일이었다.
2. 1920년대 감리교회의 현황과 태화사회관의 설립
1) 북감리교회의 현황
1920년 당시 북감리교회는 12개 지방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 무렵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3.1운동이후 새로운 세계를 갈구했던 젊은이들이 대거교회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를 맞아 1921년의 북감리교회는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했고 그 결과 1919년 19,287명서 1924년에는 20,144명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1925년부터 북감리교회는 더 성장하지 못하고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몇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는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경제적 빈곤이며 둘째는 교회에 큰 기대를 걸고 온 젊은이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고 셋째는 1925년 이후 사회에 급부상한 사회주의 물결의 여파이다. 넷째로는 1920년 후반에 상실하게 된 지도력이었다. 초기부터 이끌어왔던 최병헌 목사, 김창식 목사가 각각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중 김창식 목사는 한국의 성 바울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침체 분위기 속에서도 북감리교회는 내적으로 성숙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9년에는 지금까지 선교사들과 한인교회 지도자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각 지방의 감리사직에 일제히 한인 교역자들이 임명되었다. 이것은 한인 교역자들의 지도력이 성장하여 실제 선교사업의 현장이 한인들에 의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1930년에는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여 자치하는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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