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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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신라의 삼국통일은 미리 민족적 통일성을 내세우면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삼국간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자기 보존의 방편이 상대국의 탄병(呑倂) 남의 것을 모두 빼앗아 합쳐 자기것으로 삼음
이라는 국가의식(國家意識)으로 깊이 작용한 결과였다. 삼국통일의 주체적 당사국인 신라는 삼한(三韓)을 한 국가로 통합했다는 ‘일통삼한(一統三澣)’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삼한은 삼국을 상징했기 때문에 신라인은 고구려 백제가 같은 한족(韓族)이라는 동족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邊太, ( 2, 東國大, 1985), 58쪽.
인종적 문화적으로 동질적 성격을 지닌 국가군(國家群)으로 盧泰政, ( 38, 1982), 129~156쪽.
상호의존적 균형을 취하면서 비교적 자주 접촉하는 동안에 비록 자각된 것은 아니더라도 동족적 친근감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것이 신라에 의한 국체(國體)의 통합과 새로운 지배질서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차츰 신라국민으로서 더욱 동질성을 자각하면서 동족의식이 뚜렷해졌을 것이며 민족적 융화가 촉진되었을 것이다.
무열왕 7년(660) 이래 신라는 일부 백제토지와 유민을 흡수하여 당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1월에는 포로한 백제인 중에서 좌평 충상 상영과 달솔 자간에게 일길찬(7등위)을 주어 총관으로 임명하였고 은솔 무수에게는 대나마(10등위)에 대감직을 주었다. 또 은솔 인수는 대나마에 제감으로 삼았다. 이들은 재질(才質)을 고려한 임용이라 했는데, 실은 백제국 부흥군 진압에 동원키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들이 백제의 포로나 항졸(降卒)을 인솔하고 출전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문무왕 원년(661) 2월에는 충상을 아찬(6등위)으로 승급시켜서 사비성을 공격하는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는데 참전시키고 있다. 다시 그해 7월 17일에는 충상이 품일 등과 함께 상주총관에 임명되고, 자간은 진흠등과 하주총관에 임명되었다. 이들 신라군은 당의 고구려 침공에 상응하여 북상하다가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였다. 신라에서는 우술성에서 항복한 달솔 조복을 급찬(9등)에 고타부군(안동) 태수로 삼았고, 은솔 파가에게 급찬에 전택과 의물을 주었다는 것인데, 이들 또한 일부 백제 유민과 동반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백제정벌과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항복한 백제 장군들은 다시 전쟁터에 동원하기 위하여 임시로 관등과 관직을 수여하였으나 문무왕 11년부터 백제가 평정 통합됨에 따라서 백제 유민에 대한 대처 방안이 대두한 듯하다. 그것은 주로 백제의 관료와 장군 등을 신라의 관료조직체계내(官僚組織體系內)로 흡수할 때의 처우규정으로서 문무왕 13년에 확정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는 한창 나당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신라가 백제 전지역을 정복하면서 대당전쟁을 더욱 활기있게 추진할 인적자원을 종래 신라인 수만큼이나 더 얻은 셈이지만 백제 유민은 대당전쟁에 그렇게 많이 동원된 것 같지는 않다. 신라로서는 단지 이들을 조속히 안정시키는 일 또한 큰 과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고구려가 패망한 문무왕 8년을 전후하여 그 유민도 적지 않게 신라로 망명 투항해 왔다. 즉 문무왕 6년에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제(弟)
가 12성(城) 765호(戶) 3,543인(人)을 가지고 투항하였다. 신라는 연정토와 그 종관 42인을 왕도 주부 등에 안치시키고 의물 양과 가사를 주어 새로운 정착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12성 중에서 8성은 성읍 백성이 온전함으로 사졸을 보내서 지키게 했던 것이다.
또 문무왕 8년 11월 5일 신라군이 고구려정벌을 마치고 개선할 때 포로 7,000人과 함께 입경하였다. 다시 문무왕 10년 6월에는 안승 고구려 부흥운동 때 추대된 왕. 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 670년(문무왕 10)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劒牟岑)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어, 한성(漢城;황해남도 載寧)을 근거지로 당(唐)나라에 항쟁하였다.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문무왕에 의하여 고구려왕에 봉해졌다. 당나라 고간(高侃)의 침입을 받고 이에 대처하는 방안에 대하여 검모잠과 대립, 검모잠을 죽인 뒤 신라에 투항하였다. 674년(문무왕 14) 신라에 의하여 보덕국왕(報德國王)에 봉해지고 683년(신문왕 3) 경주로 초청되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 성을 부여받고 신라 귀족이 되었다.
등 고구려국 부흥운동 4,000호가 망명해 왔다. 이렇게 수차에 걸쳐 신라로 망명 투항한 고구려 유민은 공식적 집계만도 30,543명인데 이 숫자는 7세기 당시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여기에 점령한 고구려 남경의 토지와 유민까지 참작하면 놀라운 팽창이었다.
이들 고구려 유민의 상당수는 문무왕 10년 이후 백제고지의 정복과 대당전쟁에 동원되었을 것이나 문무왕 16년에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이들 고구려 유민에 대한 조치가 정책적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 투항 포로한 고구려 유민은 따로 신라 내지에 분산 안치했으므로 별다른 문제가 없었겠지만. 고구려국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안승집단은 신라로 망명하면서 금마저에 머무르게 했는데 거의 독립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안승집단은 문무왕 14년까지 ‘고구려’라 했을 것이며, 그이후부터는 ‘보덕국(報德國)’으로 책명(冊命)하여 신라 스스로 종주적 의미를 강화하면서 그들의 독자성을 부인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아직 나당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은 이들 집단의 성격은 그런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문무왕 20년에 왕의 누이를 안승에게 시집보내고 문무왕 23년에는 그에게 소판(3등위)을 주는 동시에 김씨로 사성하여 갑제와 양전을 주고 경도(京都)에 살도록 하였다. 보덕국은 안승을 왕으로 문무왕 23년까지 고구려 관제를 사용하면서, 신라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운영되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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