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시대의 감리교회 망국의 소요 돌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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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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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윤치호가 외유 10년 만에 귀국하던 1895년에 서재필도 귀국했다. 서재필은 아펜젤러 집에 머물면서 그는 1896년에 민중 계몽을 위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윤치호,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자주독립과 내정 개혁을 목적하는 민권운동을 전개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김홍집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고, 내정개혁 등 내정간섭을 통해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본의 세력부식에 장애가 되는 것이 친로적 노선을 걷고 있던 민비 세력이었다. 이에 일본은 민비를 시해하는 흉악한 사건을 저질렀다. 이러한 공포분위기에 못 이긴 고종은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가난한 국민들은 나날이 어두운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토록 망국의 비탈길에 서 있는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는 무엇인가 조처를 취해야만했다. 서재필이 먼저 착수한 것은 민중을 계몽하고 민중을 대변하기 위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1896년 4월 7일에 창간호를 낸 독립신문은 순한글로 간행함으로써 민중에 파고들었다. 정부와 백성사이의 의사소통을 하도록 하며, 부정부패와 불법 행위를 고발하고, 국민에게 국내외의 사정을 알리며, 국민의 의사를 공평하게 대변하려고 했다. 또한 한국의 사정과 국민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문판을 함께 간행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배재 안에 있는 감리교 출판사(심문출판소)에서 인쇄 되었다. 이들이 목적한 것은 단순한 민중의 계몽에 그치지 아니했다. 종국에는 한국이 외세로부터 벗어나서 자주독립할 것과 부패하고 봉건적인 내정을 개혁하여 근대국가로 발전케 하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윤치호, 이상재 등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그들은 우선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며,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을 건립하고 독립공원을 또한 건립함으로써 한국이 주권국가임을 상징케 했다. 독립문 기공식에는 내외 귀빈들이 모인 가운데 아펜젤러의 기도가 있었고, 배재 학생들의 애국가 합창이 있어 공개된 기독교 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그들이 추진하는 민족 운동의 기반을 민중과 함께 배재 학당과 정동교회에 두고 있었다. 서재필은 아펜젤러 집에 우거하면서 배재 학생들에게 강의하며, 학생운동을 지도했고 윤치호는 관직에 있으면서 배재 학생들을 위한 강연회를 자주 열었다. 그리하여 독립문 기공식이 있은지 열흘 만에 한국 최초의 학생회인 협성회가 배재 학당 안에 조직되었다. 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충군애군(忠君愛國)하는 마음을 굳게 세워 의기 와 용맹을 기르고 학생들 사이의 동창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대로 전국 동포에게 전하고 권면하는 데 있다. 이들은 공개적인 토론회와 협셩회회보를 간행했다. 이상과 같은 고찰에서 우리는 엡윗청년회와 협성회가 같은 기반 위에서 있으며 독립협회도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공통된 지도력이다.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단체였고, 협성회는 계몽적인 단체였으며, 엡윗청년회는 선교단체였다. 따라서 지도자들의 성격에 다라 그 관여도에 창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공통된 정신적 기초는 기독교 신앙 위에 선 민중구국운동이라는 것이다. 둘째 세 단체는 다 같이 순한글 신문 발행을 통해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확립했고 민중속에 파고들어 민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셋째 토론회의 개최를 통해 민중계몽사업을 전개했다.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주제, 협성회는 계몽적인 주제, 엡윗청년회는 보다 종교적인 주제에 집중했다.
또한 독립협회와 배재학당 그리고 감리교회가 하나의 유기체로 움직이게 된 가장 큰 사건은 만민공동회 운동이었다. 1898년에 전개된 만민공동회 운동은 독립협회가 목표로 했던 내정개혁과 자주 도릭ㅂ을 위한 운동의 절정에 핀 꽃이다. 아관파천 후 노골화된 제정 러시아의 한국 침략정책을 사전에 막으려는 민중 시위운동이었다. 만명 가까이 모인 민중들은 한국에 파견된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켜 줄 것을 결의하고, 그 결의 전문을 러시아 공사와 러시아 외무대신에게 발송하도록 했다. 이때 연사로 나와 웅변을 토한 이는 이승만 문경호 현공렴등 배재의 협성회 회원들이었다. 만민공동회의 압력에 굴복한 정부는 다음날 러시아 공사에게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쓰지 않기로 했나는 통지문을 냈다. 이것은 민중의 일대의 승리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 배후 인물인 서재필을 추방하도록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결국 서재필은 추방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윤치호의 손으로 계승되어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896년 10월 28일부터 6일간에 걸친 종로에서의 관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전개한 민족 자주독립 운동의 절정이었다. 거기에서 국정개혁을 위한 헌의육조(獻議六條)를 결의하고 정부 고관들을 참석시켜 이에 동의하도록 했다. 헌의육조란 외국사람에게 의지하여 붙지 아니하고 관원과 백성이 힘을 합하여 국권을 든든히 한다는 조항을 위시로 국가 이권에 관한 문제, 국가 재정에 관한 문제, 공평한 재판에 관한 문제, 인사에 관한 제반 문제를 정부기관을 통해 공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종은 결국 이를 승인하는 칙서를 내렸다. 이로써 한국은 내정이 개혁되고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러나 수구파들이 괴문서를 작성하여 독립문, 광화문 등에 붙였다. 고종은 자기를 폐위하고 공화제를 한다는 말에 격분했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해산하는 한편 그 지도자들에게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다행히 회장 윤치호는 체포망을 피해 안펜젤러의 사택에 은신할 수 있었다.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위해 정부의 수구당은 어용단체 황국협회로 하여금 전국의 보부상인들을 동원하게 하여 폭력을 휘두르게 했다. 이들은 또한 이러한 개혁운동의 뿌리가 바로 기독교 정신에 있는 것이오, 그 본부가 정동교회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정동교회에 협박장을 보냈다.
민중의 시위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이에 굴복했다. 체로된 17명을 석방해야 했고, 드디어는 조병식과 보부상의 두목들도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것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했다. 일본과 러시아 등의 외세를 등에 업은 수구파들은 역습했다. 드디어 1898년 12월 25일 군대를 동원한 가운데 고종은 칙어를 내려 만민공동회를 단죄하고 해산시켜 버렸다. 그러난 만민공동회를 통해 민중은 민족의식에 눈 떴고 역사의식을 새롭게 함과 동시에 자신의 힘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되었다. 민권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중심을 이룬 힘은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서재필, 윤치호, 아펜젤러, 그리고 그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독립협회 운동의 중심 세력들이었다. 이러써 한국감리교회의 개척자 아펜젤러의 신앙과 사상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2. 을사조약과 헐버트와 감리교회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하관조약에서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를 할양받았으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는 중국에 되돌려주게 되었다. 또한 러·일전쟁은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결과 영국, 미국, 러시아로부터 한국에서의 특권을 인정받아 한국의 주권을 박탈하고 보호국으로 만들 채비에 들어갔다. 이에 반대하면서도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고종 황제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얻으려고 했다. 그것은 한·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내용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종은 그가 가장 신임하던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에게 친서를 주어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급파했다. 한편 헐버트의 밀사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일본은 그가 떠나기 전날 그에게 도미를 포기할 것과 그렇게 하면 막대한 경제적 혜택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헐버트는 이를 물리치고 1905년 10월 중순 가족과 함께 배편으로 워싱턴을 향해 떠나갔다. 그의 출발을 확인한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공작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이등박문을 특명대사로 하여 1905년 11월 9일 한국으로 급파했다. 그리고 불과 며칠이 지난 11월 17일 밤에 이등은 불법적인 강제 수단에 의하여 한국 정부로 하여금 조약에 조인하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다. 을사조약이 맺어지던 날 헐버트는 워싱턴에 도착했다. 백악관을 찾아 대통령을 만나려 했지만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미 을사조약에 관한 일본의 전문이 와 있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친일정책을 쓰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그들의 국익을 위해서는 한·미수호조약의 조문 따위를 휴지와 같이 생각했다.
을사조약의 보도는 온 국민의 분노와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망국의 비운에 부딪친 한국 교회는 다음날 장로교와 감리교와 침례교의 합동으로 연합기도회를 열고 구국을 호소하는 철야기도회를 가졌다. 상동교회의 전덕기 전도사가 중심이 되어 전국에 있는 엡윗청년회의 연합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전국연합회의 간부들을 소집했다. 진남포감리교청년회 대표 김구, 상동교회의 이준, 정동교회의 최재학 등 22명이 모인 가운데 이들을 을사보호조약의 무효화를 결의하고 이를 위해 상소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전덕기는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였고, 김구는 황해도 안악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교육사업을 폈다. 상동파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민족운동 조직이 1907년에 귀국한 안창호의 지도력을 만나 비밀결사 신민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헐버트는 한국으로 돌아오자 곧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고종과 교계 인사들에게 알렸다. 이에 고종은 일본의 한국 강탈을 세계에 호소하고 열강의 공동 보호를 구하기 위해 상동파의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이 해아 밀사 사건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것은 헐버트와 상동파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그는 밀사 사건이 실패한 뒤에도 한국을 위해 글을 쓰는 등 활약을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가 한국에서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9년 7월 한국 정부의 국빈으로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86세의 고령으로 장거리의 여독을 풀기가 어려웠다. 그는 도착한 지 한주일 만인 8월 5일 그가 사랑하던 한국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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