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멸망 과부 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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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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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5C22544A-7EE6-4342-B048-85BDC9FD1C3A}한국고중세사
목차
1. 7장 제 3논문, 사비천도와 삼국항쟁의 격화
-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항쟁
- 濟羅同盟의 붕괴와 그 추이
- 무왕의 집권과 濟羅의 대립
2. 8장 제 1논문, 나당연합군의 침입과 백제의 멸망
- 의자왕의 집권과 삼국항쟁의 격화
- 대외정세의 변화와 백제의 대응
- 사비성의 함락과 백제의 멸망
3. 8장 제 2논문, 부흥운동의 전개와 그 추이
- 부흥군의 거병과 거점의 확보
- 부흥운동의 확산과 전선의 확대
- 부흥운동의 좌절과 신라의 백제 통합
1. 濟麗의 대립과 오곡 전투
고구려는 백제가 무녕왕 때에 회복한 한강 이북지역을 탈환하려고
성왕이 즉위한 해부터 공격을 감행
→ 529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한강 이북지역 상실.
《三國史記》地理志에
A. 北韓山郡(또는 평양이라고 하였다). 骨衣內縣. 王逢縣(또는 皆伯이라고도 하였다. 漢氏 미녀가 안장왕을 만난 곳이므로 王逢이라고 이름하였다). 買省郡(또는 馬忽이라고도 하였다). 七重縣(또는 難隱別이라고도 하였다). 波害平史縣(또는 蓬이라고도 하였다). 泉井口縣(또는 於乙買串라고 하였다). 述忽縣(또는 首泥忽이라고도 하였다). 達乙省縣(漢氏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高烽이라고 이 름하였다).
▶ 고구려가 한강 이북지역에 위치한 고양,파주,김포,강화 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토착세력의 도움을 받은 사실을 반영한다.
2. 사비천도와 북벌의 단행
성왕은 고구려의 남하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로 조성된 난관을 돌파하고자 538년에 사비로 천도를 단행
일대 혁신을 단행하여 백제 중흥의 토대를 마련하고 국왕 중심의 지배구조를 확립
사비천도 2년 뒤 장군 燕會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고구려는 백제의 공격에 맞서 548년에 濊(영서 말갈)의 군대 6천 명을 보내 漢北의 獨山城을 공격함.
신라의 진흥왕은 양국이 지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 명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상주-보은-옥천-문의로 연결되는 교통로의 요지에 성곽을 축조하여 충북 남부지역에 군사적 거점을 마련함.
◎ 가야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대립
백제는 함안의 안라가야와 고성의 소가야 등을 장악하면서 고령의 대가야를 압박 →대가야는 백제의 진출에 맞서 신라와 연합 시도.
이로써 백제와 신라는 각각 함안의 안라가야와 고령의 대가야를 앞세워 낙동강 서쪽의 옛 가야지역의 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한 대립.
성왕은 대가야안라 등의 7개 소국 대표들과 두 차례의 사비회의를 통하여 가야연맹제국에 대한 부용화를 도모. → 둘 다 실패
안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 548년 정월에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독산성 전투를 유발하였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배하고 安羅 및 倭新館의 계략이 드러나면서 가야연맹은 백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550년을 전후로 하여 부용세력으로 전락
나제연합군과 가야병력은 한강유역을 점령.
《日本書紀》欽明紀 12년 조에는
C. 백제 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두 나라는 신라, 임나) 고려를 정벌하여 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여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신라는 백제의 제안을 거부하고 고구려와 군사행동을 같이 하면서
한강이남지역을 차지
이로써 성왕의 북벌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보내어 小妃로 삼게 하는 굴욕을 감수.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서해를 통한 중국과의 해상교통로를 확보한 것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신라는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陳과 북조의 北齊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