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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단양 사족의 동향과 평산 신씨의 향촌사회 활동 -
분야 인문과학 > 한국사
저자 김의환
발행기관 역사실학회
간행물정보 역사와실학 2016년, 歷史와實學 第59輯, 301page~344page(총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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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부제 : The Trend of Danyang Sajok and Activities of Pyeongsan Shin Clan of Country Socie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단양의 세거 성씨와 사족의 동향
Ⅲ. 평산 신씨의 입향과 향촌사회 활동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국문초록
단양은 영남 士林들이 죽령을 넘어 서울로 왕래하는 출발지이자 도착지였기 때문에 독특한 儒風을 간직하였고, 일찍부터 단양 우씨와 단양 장씨 등 여러 사족이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이곳에 있는 丹陽鄕校는 태종 15년(1515)에 건립되었고, 명종 때 黃俊良이 부임하여 향교의 이건과 함께 우탁을 제향하는 사우를 세웠다. 그리고 현종3년(1662)에는 禹卓과 李滉을 병향한 丹巖書院이 건립되어 숙종 18년(1792)에 사액을 받았다.
단양 사족의 동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鄕案과 靑衿錄이다. 유력한 사족들의 명부인 향안은 신분적 권위의 상징이었는데, 단양의 향안은 18세기에 중수되면서 향안질서에 변화가 나타나 입록을 둘러싸고 鄕戰이 전개되었다. 이때 신향은 나이에 따라 『新舊合錄』을 작성하였고, 이에 구향은 다시 정조 8년(1784)에 자신들만의 『新舊別錄』을 작성하였으며, 신향은 다시 『丹丘新鄕錄』을 작성하여 기존의 향촌질서에 도전하였다.
향안에 입록된 성씨는 단양 장씨가 전체 406명 가운데 77명(19.0%)이었고, 평산 신씨가 73명(18.0%)이었으며, 원주 이씨가 67명(16.5%)을 기록하는 등 7개의 성씨가 319명(78.6%)을 차지하였다. 청금록 역시 원주 이씨가 전체 401명 가운데 108명 (26.9%)이었고, 단양 장씨는 97명(24.2%)이었으며, 평산 신씨가 68명(17.0%)을 등재하는 등 6개의 성씨가 394명(98.3%)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19세기까지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유지한 가운데 신향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평산 신씨 신성부원군파는 중종 때 申希哲이 처음 단양에 입향한 이후 선조 때 申孟慶이 제천현감을 지내고 효자로 정려를 받음으로써 크게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후 단암서원 사액을 주도한 申益謙과 申以悌를 비롯하여 무신란 때 공신이 된 申周潤과 문과 급제자 申泰觀 및 한말 의병 申泰植 등을 배출하였다.
평산 신씨는 향촌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숙종 8년(1682) 신익겸이 단암서원의 사액 상소를 주도하였고, 17년(1691) 신이제가 다시 상소하여 이듬해에 결국 이를 성사시켰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권상하 등 노론세력의 지원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단암서원의 원장은 노론계가 장악하였다.
이들은 향안과 청금록에도 많은 인물을 등재하였는데, 향안에는 73명(18.0%)이 입록되었고, 청금록에는 68명(17.0%)이 등재되는 등 향권을 주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현조의 추숭에도 힘써 신맹경의 정려각과 정려비 및 묘갈을 건립하였고,『雲溪遺事』의 편찬을 추진하였으며, 헌종 2년(1836)에는 그를 제향하는 丹溪祠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평산 신씨는 단양 사족을 대표하는 노론계 가문으로서 사회적 위상이 매우 높았다고 하겠다.
 
 
영문초록
Danyang was both depature point and destination for Yeoungnam people’s coming and going before heading on to Seoul, so many Sajoks settled early in this area. Danyang hyanggyo was built in 1515, under the reign of King Taejong and it was relocated in the reign of King Myeongiong. And there, a shrine holding sacrificial rite for Utak(禹卓) was established. In three years of the reign of King Hyeongjong(1662), Danamsewon (丹巖書院) was built and in eighteen years of the reign of King Sukjong(1792), it was recognized.
Hyangan(鄕案) and Chunggeumrok(靑衿錄) are reference materials to comprehend the trend of Danyang Sajok. Also, Hyangan was a symbol of authority and social status among powerful Sajoks. Order of Hyangan was changed, so that Hyangjeon(鄕戰) between existing yangban and new yangban was occurred. New yangban compiled Shinguhablog(新舊合錄) and Dangusinhyanglog(丹丘新鄕錄) and existing yangban did Shingubyeollog(新舊別錄) in the reign of Jyeongjo(1784).
To review the overall registered family names in Hyangan, Danyang Jan clan was 77(19.0%) and Pyeongsan Shin clan was 73(18%) in the total number of 406 family names. Herewith, in Chunggeumrok, Wonju Lee clan was 108(26.9%) and Pyeongsan Shin clan was 68(17%) in the total number of 401 family names. They had taken a lead in country society until the 19th century and at the same time faced many challenges by new yangban.
Since Shin heecheol, one of Pyeongsan Shin clan, set foot in Danyang for the first time, Pyeongsan Shin clan had achieved greatly growth by Shin Maenggyeong’s winning a filial son award during the reign of king Sunjo. In addition, they played a leading part in recognizing Danamsewon and developed fully activities of country society. After all, the next year it was recognized. At that time, they were supported by Nolon, such as Gwon Sangha. By using this opportunity, the director of Danamsewon from Nolon, came to seize power.
Pyeongsan Shin clan registered many people in Hyangan and Chunggeumrok. Also, as a movement for ancestors’ worship they tried to set up memorial monument house and monument for the filal Piety of Shin Maenggyeong. Besides, they published Ungyeyusa(雲溪遺事) and built Dangyesa(丹溪祠) in the reign of Hyeonjong(1836). In conclusion, Pyeongsan Shin clan representing Danyang Sajok had elevated its social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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