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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축조에 있어서 ``축성신도(築城新圖)``의 반포 목적과 고고학적 검토
분야 인문과학 > 동양사
저자 심정보 ( Jeong Bo Sim )
발행기관 (재)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동아시아문물연구소
간행물정보 문물연구 2012년, 제22권 161~187쪽(총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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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외침에 대한 우리나라의 역대 방어 전략은 들판의 곡식을 깨끗이 치우고 산성으로 입보하여 적이 지쳐서 물러갈 때를 기다려 공격하는 청야입보(淸野入保)정책이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청야입보정책에서 연해읍성의 출현은 새로운 방어 전략의 모색이었다. 이는 미처 피하지 못한 백성과 옮기지 못한 가축이나 곡식의 손실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읍성의 축성재료 면에서는 석성, 토성, 벽성, 목책도니성, 목책이 다양하게 축조되고 있었으나, 고려시대에는 토성이 보다 많이 축조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만 하더라도 토축과 석축이 병행하여 이루어졌으며, 체성은 도성의 축조기법에 따라 경사면의 내탁부가 이루어지도록 축조하였다. 그런데, 세종 20년에 「축성에 대한 새로운 도본」을 반포하여, 체성을 모두 석재로 쌓도록 하고, 토사로 이루어진 경사면의 내탁부도 석재로 계단을 이루도록 하여, 읍성의 석축화(石築化)가 시행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세종은 적대(敵臺), 옹성(甕城), 연대(煙臺)의 도본을 내려 중요 방어시설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석축화가 이루어진 것은 세종 16년 3월에 최윤덕이 고려 때 모두 흙으로 성을 쌓아 民力만 낭비하고도 功이 없었다고 하여 우리나라에는 축성할 石材가 없는 곳이 없으므로 마땅히 石城을 쌓아 영구하게 하자고 거듭 건의한 것이 반영된 것이다. 읍성의 석축화를 위하여 「축성에 대한 새로운 도본」을 반포하여 규식화 한 것은 당시 병조판서였던 황보인의 건의에 의하여 추진되었으며, 도본 작성은 ‘수성전선색(修城典船色)’에서 작성하였다. 그러나, 읍성을 석재로만 축조한 이후 오히려 축성 완료후 단기간에 붕괴되는 현상이 진행되므로 세종 25년에 이보흠이 상소하여 다시 도성 축조기법에 의하여 체성을 축조할 것을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고고학적으로 웅천읍성 증축과정에서 이러한 변화를 살필 수 있으며, 단종 1년 이후에는 도성축조기법으로 다시 축조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즉 내벽에 석재를 사용하여 계단상으로 축조하였던 등성시설(登城施設)이 토사를 정교하게 다져서 경사면을 이루는 등성시설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발굴조사 시에 체성의 기저부 조성방법과 수·개축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문초록
Throughout history, Korea`s defense strategy against foreign invasion consisted in clearing the field and entering the fortress. To be more specific, Korean ancestors first removed all crops from the field and entered the fortress. They then waited until the enemies grew tired and began to withdraw. It was at that moment that Koreans started attacking them. Considering such a traditional policy of “clearing the field and entering the fortress,” construction of Yeonhae Walled City meant searching for a new defense strategy. That was because it was lamentable to lose people, livestock and crops that had still remained in the field. For a walled city, a variety of fortresses were constructed and the examples are stone fortress, earthen fortress, walled fortress and fortress composed of a wooden barricade and mud. During the Goryeo Dynasty, earthen fortresses were the most common. On the other hand, at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both earth and stone were used and the inner part of the incline in the fortress body was built according to the construction technique used for the capital. However, during the 20th year of King Sejong, the Korean government published The New Guidelines on Fortress Construction. These guidelines were mainly about recommending masonry for walled cities. For example, all fortress bodies had to be built with stone and the inner parts of inclines made of earth and sand had to have a staircase made of stone. In the same year, King Sejong ordered construction of major defense facilities, providing guidelines on outer wall, outwork and storage. Stone fortresses came to be built following Choi Yun-deok`s suggestion in March of the 16th year of King Sejong. At that time, Choi constantly argued for constructing stone fortresses. To elaborate on his position, he pointed out that during the Goryeo Dynasty, all fortresses had been made of earth and that it had been just a waste of human resources because these fortresses had been useless. He also added that since stone is everywhere in Korea, it must be used to construct fortresses so that they can be used permanently. Following the advice of Hwang Bo-in, then Minister of War, The New Guidelines on Fortress Construction were published and stone became the official material of walled cities. The guidelines were drawn up by an organization called Sujseongjeonseonsaek. However, using only stone for walled cities resulted in collapse shortly after the completion of a fortress. That is why during the 25th year of King Sej ong, Lee Bo-heum asked the government to respect again the construction technique used for the capital to construct fortress bodies. Archaeological research allows these changes to be observed in the process of extending Ungcheon Walled City. Such research also makes clear that after the first year of King Danjong, the construction technique of the capital was used again. In other words, before this period, a stone staircase was built on the inner wall of a fortress while later on, an incline made of dense earth and sand was used instead. This explains why during excavation, it is important to study how the foundation of a fortress body was built and to see if construction and reconstruction were carried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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