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王羲之) 난정수계(蘭亭修계)의 수용 양상과 시사(詩社)에 끼친 영향
분야
어문학 > 국문학
저자
박철상 ( Chul Sang Park )
발행기관
우리한문학회
간행물정보
한문학보 2012년, 제26권 3~32쪽(총30쪽)
파일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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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초록
    중국 晋나라 永和9년(서기 353년)에 왕희지를 비롯한 42명의 문사들이 蘭亭修계를 거행한 뒤로 난정수계는 文士雅會의 모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수용하였다. 특히 <蘭亭敍>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줄곧 서법의 전범이 되었다. 이는 신라시대 이래로 왕희지체를 善書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蘭亭故事는 癸丑년이나 上巳日의 문인들 雅會에서 시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蘭亭記>나 <蘭亭詩>에 등장하는 글자나 구절을 集字하여 시를 짓기도 하고, <蘭亭記>에 등장하는 글자만으로 집자체시를 짓기도 하는 등 蘭亭修계는 詩作을 통해다양한 형식으로 수용되었다. 난정수계는 그림을 통해서도 수용되었다. 그림의 경우에는 글씨나 시문처럼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림을 통해서 蘭亭修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사들의 雅會중에는 蘭亭修계의 뜻을 잇고자 하는 모임들도 있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蘭亭修계의 고사를 표방한 모임은 많이 있었지만, 명칭까지 난정수계를 표방한 모임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난정수계는 왕실의 유흥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正祖는 奎章閣을 설치하고, 賞花釣魚의 故事를 모방하여 봄마다 閣臣과 內苑에서 꽃구경하고 낚시질하는 것을 정례화 했다. 1788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閣臣이 주관하였고, 閣臣이 아닌 사람은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 계축년(1793, 정조17) 3월에 이르러 蘭亭修계의 고사를 본떠서 그 숫자를 더욱 확대했는데, 이때에는 각신이 아닌 선비들까지 참여시켰다. 이는 蘭亭修계의 숫자에 일치시키려 한 점도 있었지만, <蘭亭記>의 ``少長咸集’의 의미에 부합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정조의 계축년 內苑賞花모임은 왕희지의 蘭亭修계가 있었던 永和9년의 계축년 3월과 부합함으로써 그 의미가 부여되었고,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이는 궁중의 賞花釣魚의 고사와 蘭亭修계의 고사를 일치시킨 일로 정조의 통치행위의 일단으로도 이해할 수있는 부분이다. 이는 이후 난정수계의 수용양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정조의 知遇를 입은 여항인들이 중심이 된 玉溪詩社는 난정수계를 모방하여 성대한 시회를 열었다. 이는 19세기 여항인들의 詩社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난정수계는 그 자체가 이벤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일반적인 시사의 경우에는 지속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밖에 癸丑년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詩社에서 난정수계의 의미는 이벤트적 성격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영문초록
    After WangXizhi and 42 literati had NanJeongSugye in Yeonghwa 9(AD353), it became the model of literati social meeting. Korean literati also accepted it in various ways. Nanjeongseo was the calligraphic model from Shilla to Joseon. Because Wang was regarded as the standard of good calligraphy. The Meeting of Nanjeong had powerful influence in literature. It was appeared often in Gyechuk year and Sangsa day poems. The poets made a new poem through citing the word in Nanjeonggi and Nanjeongsi. Through the painting, which remained not as much as the calligraphy and poem, they understood the meaning of NanJeongSugye in depth ways. Some literati tried to success the NanJeongSugye. Many of them claimed to support the NanJeong, but not many of them had the title of NanJeong. Meanwhile, NanJeong influnced on the royal entertainment. Jeongjo established Kyujanggak and imitated fishing and flower viewing of Nanjeong. He made it as the annual event with his Kyujanggak official. The event was started in 1788, No one except Kyujanggak official could attend the meeting. After 1793, it was opened to wide scale literati because the king waned to reproduced the meeting with all the young and old getting together. The cycle of the year and the days was coincided with the original day of NanJeongSugye, the meeting was very meaningful, and was regarded as a symbol of the peaceful reign. It was a kind of kings ruling ways. The king`s event made an important influence on accepting NanJeongSugye`s way. The middle class literati meeting, Oggyesisa succeeded NanJeongSugye and made grand literary meeting. The 19th century middli class literati followed the way of meeting. But NanJeongSugye was the one time event so it was hard to continue the meeting. Most people could meet the Gyechuk year cycle once in a lifetime. The meaning of NanJeongSugye was that it was the one-time event in a life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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