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광 ( Jo Yeong-kwang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2020] 제63권 5~29페이지(총25페이지)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발견 후 많은 관심을 받아왔고 관련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충주 고구려비를 둘러싼 제논의는 사실상 발견 당해와 20년이 지난 후 치러진 두 차례의 판독 작업과 학술회의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발견 40주년을 기념해 행해진 2019년의 판독회와 당해에 개최된 두 차례의 학술회의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들이 나왔다. 이처럼 학술행사는 충주 고구려비 연구의 촉매제 역할을 하며 관련 연구 성과의 확산과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자체로도 연구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회고와 정리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삼국시대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쓰러지고 세워졌으며, 또한 매몰되고 옮겨지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돌 혹은 입석이라는 마을 지명으로 남아 있게 되었고, 뒤이은 학술조사, 입석마을 주민의 증언, 사진기록, 설화 등을 통해 건립지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고구려비 주변의 고지형과 역사지리 분석을 통해 지금까지 특정 장소로 비정할 수 없는 건립지점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 글은 충주 고구려비 주변의 고지형과 역사입지를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는 충주 고구려비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자료관이 건립되는 현재까지를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입석마을과 고구려비에 관한 연구는 비가 길목에 위치하며 특히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지점에 입석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비를 건립...
하문식 ( Ha Moon-sig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2020] 제63권 61~86페이지(총26페이지)
이 글은 초기 고구려의 기층문화를 파악하기 위하여 신빈 지역의 소협하 유역에서 조사된 동굴무덤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것이다.
소협하는 신빈 지역의 해발 500m 이상 되는 산지 지형에 흐르는 물줄기로 주변이 카르스트 지형이기에 석회암 동굴이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동굴무덤은 대부분 강가의 낭떠러지에 위치한다.
신빈 지역의 동굴무덤 구조는 돌덧널과 움무덤이 섞여 있고 대부분 무덤방 위에 돌무지 시설이 있다. 묻기는 화장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소홍석립자 동굴무덤의 경우 돌무지 속에서 많은 토기 조각이 조사되어 파쇄 의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짐승뼈가 껴묻기된 것은 영생을 바라는 당시 사회의 내세관은 물론 장송의례에 이용된 상징―제의의 짐승으로 해석된다.
껴묻거리는 석기, 토기, 청동 유물, 짐승뼈, 뼈연모, 조가비로 만든 꾸미...
고구려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던 25대 평원왕(559~590)과 26대 영양왕(590~618)이 재위했던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까지 약 반 세기 간의 불교조각을 통해서 중국 南北朝와 倭에 대한 고구려의 불교문화 교류의 가능성을 고찰하였다. 평원왕 18년(576) 북제에 갔던 고구려 승려 義淵은 法上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여 고구려 불교를 一新하였다고 알려져있다. 의연은 북제에서 여러 불교 典籍을 가져왔으며, 이때 북제 불상도 고구려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평원왕 12년(570)에는 왜국에 사절을 보내 외교적 관계를 시작하였으며 영양왕 6년(595)에 왜로 건너간 慧慈(?~622)는 20년간 聖德太子의 스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僧隆과 雲聰(602년)을 비롯해서 慧灌(605년) 및 曇徵과 法定(609년) 등도 왜로 건너...
강나리 ( Kang Na-ri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2020] 제63권 143~167페이지(총25페이지)
이 논문은 함안 성산산성 목간 작성연대에 관한 기존 연구성과 검토를 바탕으로 작성연대를 추정하고, 성산산성 목간 가운데 가야5599에만 연간지 ‘임자년’이 묵서된 것에 주목하여 이를 새로 판독하고 당시 신라 부세제도의 일면을 살펴본 것이다. 안라국의 신라 편입 시점 혹은 하한은 561년 무렵이고, 성산산성 동성벽 부엽층은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성산산성 목간에 보이는 외위명이 공통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창녕비 단계부터 남산신성비 단계 무렵으로 볼 수 있으며, 경위 역시 창녕비 단계를 상한으로 한다. 가야5599의 ‘壬子年’은 592년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성산산성 목간의 작성연대는 561년부터 592년 무렵으로, 늦춰 보더라도 7세기 전반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5599에서 임자년 다음의 두 글자는 ...
조원창 ( Cho Won-chang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2020] 제63권 169~198페이지(총30페이지)
정림사지 오층석탑 하부에는 축기부 판축토가 약 6.2m 너비로 조성되어 있다. 이에 대해 김정기는 목탑과 관련된 유구로 이해하고, 석탑 이전에 목탑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이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정림사지에서 수습된 소조상들이 탑내소상으로 해석되면서 정림사 목탑 존재설은 더욱 더 연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정림사지에서 수습된 소조상들의 출토 층위를 보면 이것들이 정림사 창건 성토층 아래의 기와구덩이와 서회랑 남단 西석축배수로의 뒤채움토에서 검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출토 양상은 결과적으로 소조상들이 정림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주변 유적의 폐기물이었음을 파악케 하고 있다.
이상의 고고학적 층위 검토는 한편으로 축기부에서 목탑의 심초석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정림사가 사비천도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목탑이 ...
이상규 ( Lee Sang-kyu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2020] 제63권 199~227페이지(총29페이지)
강화지역은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고려의 수도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는 고려 수도인 개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어려운 현재에 있어서 중요한 연구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개발행위에 따른 구제발굴 및 고려 왕실 무덤에 관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강화도 내에서 조사되는 유적 중 다수의 사례에서 고려 시대 유구가 확인되고 있으며, 기와의 경우 강화 선원사지를 비롯하여 고려 왕릉 부속 건물, 궁전지로 추정되는 관청리 일대의 건물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강화 선원사지, 강화 곤릉 이외에 8개 유적에서 확인되는 고려 시대 막새를 중심으로 기와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 시대 사용된 막새는 제작기법이 조선 시대와 유사하게 정형화된 형태이며, 특징적인 문양인 일휘문과 범자문 등이 새롭게...
강화지역은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고려의 수도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는 고려 수도인 개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어려운 현재에 있어서 중요한 연구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개발행위에 따른 구제발굴 및 고려 왕실 무덤에 관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강화도 내에서 조사되는 유적 중 다수의 사례에서 고려 시대 유구가 확인되고 있으며, 기와의 경우 강화 선원사지를 비롯하여 고려 왕릉 부속 건물, 궁전지로 추정되는 관청리 일대의 건물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강화 선원사지, 강화 곤릉 이외에 8개 유적에서 확인되는 고려 시대 막새를 중심으로 기와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 시대 사용된 막새는 제작기법이 조선 시대와 유사하게 정형화된 형태이며, 특징적인 문양인 일휘문과 범자문 등이 새롭게...
박준형 ( Park Jun-hyoung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2020] 제62권 5~34페이지(총30페이지)
이 논문은 리지린이 북경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 심사를 위해 제출했던 『古朝鮮硏究-摘要-』와 박사학위논문인 『古朝鮮的硏究』를 소개하고 그것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고조선연구와』 비교 검토한 것이다.
리지린은 북경대학 유학을 통해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중국인 심사위원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학계의 견해에 경도되지는 않았다. 그는 귀국 후에 학위논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북한학계의 요구와 현실에 맞게끔 수정하여 『고조선연구』를 출간하였다.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는 북한학계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런 점에서 『고조선연구-적요-』와 『고조선적연구』의 발견은 리지린의 고조선사 연구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기존에 학위논문 목차와 일부 내용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두 자료의 발견으로...
조원진 ( Cho Won-chin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2020] 제62권 35~75페이지(총41페이지)
본고는 고조선과 전국 燕나라의 전쟁 양상을 살펴보며 진번의 실체와 요동의 범위 문제에 주목하였다. 고조선은 기원전 323년경 전국 燕나라와 대립하였다. 당시 고조선은 요동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조선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칭왕을 하며 요서지역과 광범위한 연맹을 형성하여 燕나라와 대립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과 燕나라는 팽팽한 대립속에서도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조선은 수십년 후 소왕대 전성기를 맞이한 燕나라에 패하여 滿潘汗을 경계로 삼게 되었다.
『史記』에는 전쟁의 주체에 대해 조선과 함께 진번의 존재가 부각되어 있다. 당시 요동북부에 위치한 진번은 조선 연맹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이해된다. 燕나라의 세력이 최종적으로 미친 동단에 대해 『史記』는 眞番·朝鮮지역으로 『魏略』은 滿潘汗으로 기록하였다. 燕나라가 설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