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주체는 금융 시장에서 권장되는 신자유주의적 자기 경영 주체이지만, 대출하는 주체 곧 빚진 주체와 연결해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부채를 통한 레버리지 투자(레버리징)와 부채 청산을 일컫는 디레버리징은 대조적이지만 동일하다. 레버리지 투자는 ‘부자 되기’의 미래를 꿈꾸고 디레버리징은 고통스러운 부채 상환을 요구받지만, 두 과정은 공통적으로 주체화를 부추기고 생산하는 ‘주체의 경제’에 속해있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레버지리 투자를 하거나 혹은 의무와 도덕의 이름으로 대출을 상환하거나 모두 주체의 경제 영역에 속한다. 투자의 성공도 자신이 쟁취한 승리요, 실패도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부채 청산 역시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주류 경제학이 요청한 주체의 경제라는 비전을 걷어내면 빚내서 투자하기, 빚 상환하기가 각각 레버리지와 디레버리징의 실체다...
한국에서의 신세대론은 발전의 명분을 앞세워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그 중에서도 X세대로 통칭되는, 1990년대 초반의 신세대에 대한 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패퇴라는 시대적 흐름에 대응해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점에서 X세대는 하나의 연령집단이기보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대변하는 명칭이었다. 다른 한편, X세대는 자유에 대한 문화적 상상력을 통해 기존의 진보적 정치담론과는 이질적인 방식의 리얼리티를 지향했던 사유의 주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수 지식인들이 제도적 민주화 아래 국가의 안정을 강조하면서 자유주의가 대두되었고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유보되었다. 또한, X세대에 대한 비판은 급진적 상상력에 보수적으로 대응하는 근거가 되었고, 신세대론 역시 자본주의의 일상화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게이머(gamer)는 현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주체다. 현대의 게임이 모순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작동시키거나 심지어 통제한다는 점에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게임 산업/문화의 발달은 성장과 경쟁의 논리를 강화했다. 여기서 게이머는 성장하는 주체, 혹은 성장을 통해 경쟁에 임하는 주체로 나타났다. 게임에 몰입한다는 것은 현실을 방기하고 쾌락의 세계로 침잠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게임은 엄격한 자기규율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경쟁력을 확보하는 ‘경제적 주체’의 수행과 연관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게이머는 쾌락에 잠식된 중독자가 아니라 자기계발의 주체이며, 게임은 이러한 주체를 대량으로 요구하는 특별한 문화산업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점을 논증하기 위해 한국의 1세대 MMORPG <리니지>(199...
이 논문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형상화한 소설을 통해 재난 자본주의의 문제성을 드러내고, 반복되는 위기 속에서 재난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의 의미를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정이현의 「삼풍백화점」(2004), 황석영의 『강남몽』(2010), 문홍주의 『삼풍-축제의 밤』(2012)이외에 신문 기사 및 구술 기록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재난을 둘러싼 일상적 위험의 문제를 드러낸 소설 쓰기 방식은 우리에게 도래한 재난의 이면을 들춰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정의된 재난, 그 이전의 위험 문제를 쟁점화한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끝났다고 선언한 권력에 대항하여 애도와 치유의 통로를 마련한다.
정이현의 소설은 집단적 숫자로만 기억된 희생자의 고유성을 복원하고, 희생자에 관한 잔인한 상상이 그들의 죽음 자체를 욕되게 함을 드러낸다. 타자의 기억...
불교서사의 하나인 금동전승은 사찰, 고승 등에 연관된 일화를 추적하는 일반적인 불교 전승담에 비해 여러 변별점을 지닌다. 즉, 널리 알려진명승 중심의 인물담이나 절의 연혁을 알리는 창사담의 기능을 넘어서는 국면을 보여주게 된다. 이에 따라 여기서는 금동캐릭터의 형성 배경, 그리고 각편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대결구도의 특성에 주목하기로 한다. 금동은 상상의 소산이라기보다는 고려 시기 정상 궤도를 이탈하고 있는 문제적 불자를 염두에 둔 캐릭터에 가깝다. 금동전승 각편들에서 폭넓게 삽입되는 금동/명승의 대결적 배치는 정/사의 경계를 보여줌은 물론 사(邪)에 대한 정(正)의 승리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서사전략과 무관치 않다. 대결담으로서 금동전승은 정법, 조각, 신술 등 3 가지의 우열 다툼으로 전개되며 시대에 따른 전승 담당층의 관심이 투영되고 있다. 초...
본고는 의원(醫員)이라는 소재가 설(說)에서 주제를 구현할 때 어떻게 활용되는지 살핀 연구다. 다양한 소재가 주제 구현을 위해 복무한다는 점은 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때문에 설에 나타난 소재를 살피는 것은 설연구의 중점이 된다. 이 노력의 일환으로, 본고에서는 의원설(醫員說) 7편에 나타난 주제 구현 방식을 분석했다. 작품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바람직한 의원과 그렇지 않은 의원을 대조하고 구체적인 일화를 제시해 세태를 고발한 경우다. 이 작품들은 의원의 역할이 작가에게 성찰의 대상이 된다. 둘째, 의원이 대화를 통해 병자의 인식을 전복시킨 경우다. 이 작품들은 의원이 병자에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작품 분석을 통해 의원설의 특징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의원설은 다른 고전 서사 작품과 달리, 의원을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영웅으...
본고는 기존의 소설문법으로는 『황제를 위하여』가 가진 특징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은 서구 및 근대를 특권화하는 인식의 산물로서, 이전의 서사물과 단절적인 지점에서 파생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小說’은 고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서사물로 오히려 서구 소설을 하위 장르에 넣을 수 있는 보다 확장적인 의미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황제를 위하여』는 소설의 범주 및 개념과 관련한 보다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텍스트 중의 하나이다. 본문에서 전통적 서사(양식)과 관련한 텍스트의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다. 첫 번째로 화자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독자를 설득하여 이야기 장으로 유인하는 화자와 독자의 상호성, 두 번째로 대화적 관계에 놓인 전통 텍스트들을 조합...
이글의 목적은 한국아동서사문학에 나타난 ‘정상가족’ 담론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정상가족 너머 ‘다양한 가족’의 가능성과 그 특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법적 부부와 그 자녀로 이루어진 혈연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정상가족’ 담론 하에서는 ‘정상’의 형태 유지를 위한 가족 구성원의 희생이 당연시 된다. 또한 ‘정상가족’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은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현실에서 ‘정상가족’의 형태가 급속도로 와해되어가고 있는 요즘, 아동 독자에게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이다. 혈연이라는 폐쇄성을 뛰어넘고 부모와 자녀라는 틀에서 자유로워질 때에 다양한 모습으로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가는 ‘다양한 가족’에 대한 이해와 인식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뺑덕』과 『섬마을 스캔들』은 이러한 ‘정상가족’ 담론의 폭력성과 그 경계를 사유한 작품이다....
국제 펜클럽 한국지부(1954)가 창립된 시기는 미국 대외원조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급증하는 가운데 반둥회의가 개최되고 냉전의 다극화 현상이 나타난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한다. 국내적으로는 이승만 정부가 중화민국, 필리핀, 베트남 등과 협의해 아시아집단안보체제(아시아민족반공연맹, APACL)의 결성을 모색하고 정부 주도의 반공/반일문화전선이 구축된 시기였다. 이 논문은 한국 펜의 국제적 활동이 어떤 성격과 규모로 소개되고, 그것이 한국 지식인의 세계성 인식과 민족문학론에 어떤 방식으로 연동되는지를 살핀 글이다. 한국 펜을 주축으로 발간된 『자유문학』(자유문학협회)은 자유아시아, 세계평화 등 정부 주도의 반공주의적 문화외교에 상응하는 독자적인 민족문학론을 전개했다. 특집 「고전과 전통」(1956)을 통해 알 수 있듯, 『자유문학』의 전통계승론과 동양문화론은...
이 글은 대한제국 말기의 재일본 유학생들이 간행한 『』태극학보『』에 대한 것으로서, 특히 핵심 연재물이었던 <역사담>의 종합적 분석을 시도한다. <역사담>은 시리즈로 기획된 서구영웅전 번역물이었다. 순서대로 콜럼버스, 비스마르크, 줄리어스 시저, 올리버 크롬웰의 이야기가 실렸다. 총 26호까지 간행된 『태극학보』의 21개호에서 확인되는바, 연재의 지속성과 비중 면에서 <역사담>에 비견될 콘텐츠는 이 잡지에 없었다.
<역사담>을 집필한 박용희는 저본 4종을 모두 박문관(博文館)에서 나온≪세계역사담≫ 총서 내에서 선택하였다. 박용희는 각 저본의 지극히 제한된 정보만을 발췌하여 번역한 반면, 자신의 독자적 발화는 대량으로 삽입해두었다. 그는 <역사담>을 통해 서양의 역사 및 인물에 관한 지식을 소개하는 동시에,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