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관 ( Kim Youngkwan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2017] 제57권 193~222페이지(총30페이지)
남단덕 묘지명은 2010년 중국 陝西省 西安市동쪽 白鹿原에서 출토되었고, 현재는 西安碑林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묘지명은 蓋石은 缺失되었고 誌石만 남아있다. 크기는 가로 44.4cm, 세로 43.5cm로 정방형에 가까우며, 두께는 6.8~7.5cm 정도이다.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가로 24행, 세로 25행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한 후, 그 안에 총 533자의 지문을 새겨 넣었다. 唐 代宗때인 776년에 만들 어졌다.
남단덕의 선조는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安東都護府에 편적되었고, 祖父인 南狄은 磨米州 都督을 지냈고, 부친인 南于는 歸州刺史를 지내는 등 당에서 지방관으로 활동하였다. 남단덕은 南于의 맏아들로 고구려 멸망 이후인 699년 고구려 수도였던 平壤에서 태어났고, 遼東에서 성장했으며, 玄宗開元초년 (713)에 발탁...
본고의 목적은 백제 대장식구의 전개 과정과 특질을 정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백제 대장식구 연구는 한성기 자료의 공백 때문에 웅진 사비기 자료가 주된 대상이었다. 그러나 공주 수촌리 고분군 발굴을 계기로 공백이던 한성기의 자료가 메워지면서 백제 성립부터 멸망까지 제작된 대장식구의 변천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대장식구를 과판의 문양에 따라 나누고 제작 기술에 주목하여 시기 별 대장식구의 특질을 정리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다양한 종류의 대장식구가 공존한 시기는 한성기이다. 한성기에는 진식대금구와 함께 용문 투조대장식구, 귀면문대장식구, 그리고 원삼국시대부터 제작된 마형대구가 공존한다. 특히 타출과 정밀 주조 기술로 제작된 귀면문대장식구는 백제에서 출현 후 가야와 왜에 완제품이 이입된 것으로 보인다.
웅진...
석성천 유역은 선사시대부터 천혜의 지형조건 및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라는 중요한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일찍이 고대 정치체가 성장해 왔음이 추정된다. 그러나 그 변동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할만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석성천 유역의 고대사에는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석성천 유역에서 확인되는 원삼국~백제시대 유적에서 조사된 물질자료를 토대로 석성천 유역의 문화상을 살펴보았다.
석성천 유역의 원삼국시대 문화상은 분묘유구의 경우 상위계층은 분구토광묘를 사용하고, 단순토광묘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계층간의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취락의 경우 사주식 주거유구와 비사주식 주거유구가 같이 조영되나 비사주식 주거유구의 비율이 높다. 이런 분묘문화와 생활문화의 큰 흐름은 금강 중하류지역 원삼국시대 문화상과 유사하지만 지리적으로 금강유역의 중간지점...
본 논고에서는 일본에 道敎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진 백제와 비교하면서 고대 일본의 도교문화를 검토해보고자 했다. 백제와 고대 일본에서 道敎가 종교로서 기능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유물·유적 속에 남아 있는 道敎文化와 道敎的 信仰 및 儀禮, 習俗 등은 종교로서의 도교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이해가 곤란하다. 본고에서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에 도교가 전해진 과정을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백제로부터의 전래가 전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했다. 백제로부터 醫博士·採藥師, 易博士, 呪禁師 등이 들어오기 시작한 6세기 중 후반부터 8세기 전반까지는 도교적 요소가 일본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天武天皇의 행적은 단지 神祇제도나 불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長屋王의 變이후 율령국가체제에서 도교를 ...
김낙중 ( Kim Nakjung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2017] 제57권 119~150페이지(총32페이지)
이 글에서는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의 특징과 그것이 백제 고고학 연구에서 가지는 의미를 익산이라는 공간에 주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7세기 전반대의 절대연대를 가진 일괄유물은 웅진 사비기 백제 금속공예품의 편년과 변천 과정을 추정하는 데 기준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금속공예품 중에서 은제관식은 형태에서도 변화를 보이지만 그 의미도 달라진 양상을 살필 수 있다.
사리봉영기의 명문으로 미륵사 조영 주체에 대한 논의가 가람배치와 맞물려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三院병렬식 가람에 대한 기획은 한 번에 이루어졌을 것이나 대지 조성층, 탑의 지하기초부 등에서 출토되는 창건 기와를 통해 토목 및 건축공사는 시차를 두고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륵사지 사리기는 주변 유적, 특히 왕궁리 5층 석탑과 그곳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의 연대 추정과 제석사 목탑과 왕...
월평동유적과 월평산성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관방시설로서 4세기 중후엽~9세기까지 이 지역의 역사 변천과 궤를 같이하여 점유세력이 변화하였다.
먼저 4세기 중후엽 5세기 후반에 저장창고군이 집중 조성되고 토성과 목책·환호 등 관방시설을 갖춘 한성백제의 물류집산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취락에서는 한성백제양식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는 등 한성백제 중앙과 연결된 거점취락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 후 5세기 후반(475년 이후)에 이르러 고구려가 점거하여 한성백제기에 축조되어 있던 기존 관방시설을 재활용하면서 새로 석축성벽①을 보축하여 多重의 관방시설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점유되지는 못하였으며, 주둔 인원 또한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6세기 중후엽에 이르면 다시 백제에 의해 월평산성과 석축성벽②가 축성되어 하나의 성체로 기능하였다. 월평산성은 ...
최근 세계화, 지방화, 개방화, 정보화라는 산적한 당면과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방정부는 경쟁력 있는 지역환경의 조성차원에서 지역경제효과 증대정책의 일환으로 관광산업육성정책은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특히 지방정부의 독자적인 관광산업 육성정책이 지방정부의 협력적 역할과 성과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됨에 따라, 지방정부는 실증적이고 통계적인 자료를 이용하여 경쟁력 있는 산업을 선택하여 육성하고자 하는 시대적 필요성에서도 백제문화권 관광개발정책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는 백제문화권 관광개발정책의 추진에 있어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첫째, 지방정부의 역할수행도와 이해관계집단의 협력적 관계의 역할실태를 파악하여 지방정부의 역할수행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 둘째, 지방정부의 역할수행에 있어서 이해관계자와의 협력관계가 미치는 역할...
이병호 ( Lee Byongho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2017] 제56권 321~348페이지(총28페이지)
익산 쌍릉은 조선총독부박물관 고적조사 위원이던 谷井濟一가 중심이 되어 발굴을 실시했지만 당시 출토된 유물에 대해서는 木棺 등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2015년 말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익산 쌍릉』 발굴 보고서를 다시 간행하면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들을 정리·소개하고, 쌍릉의 무덤 주인공에 관해서도 새로운 견해를 제기하는 등 이 분야 연구에 활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발굴한지 약 100년이 지나 발간된 것이기 때문에 자료 상호 간 일부 모순이 보이고, 유물의 출토위치에 있어서도 혼동이 있어 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Ⅱ장에서는 일제강점기 익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고적조사사업과 학술조사에 관한 전반적인 흐름을 정리하였다. 1917년 12월에 진행된 익산 쌍릉 발굴은 부여 능산리 왕릉군에 관한 발굴 ...
이 글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가운데 왜 백제만이 원지 축조 기록이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백제는 도읍을 정한 곳마다 즉 한성, 웅진, 사비에 각각 원지를 축조했다는 점은 궁금증을 더했다. 이러한 기록은 백제에서 원지 축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뜻한다. 필자는 백제 원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추적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다. 백제의 왕들이 원지를 축조했던 계기를 살펴보면, 국가가 불안정하거나 정통성이 부족한 가운데 즉위한 왕이 그러한 난제를 극복하고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원지를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시기 진사왕, 웅진시기 동성왕은 각기 국가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왕권을 상당히 안정시켰으나 원지를 축조하여 왕권을 과시한 후에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을 겪었다. 사비시기 무왕도 정통성의 문제를 안고...
한반도 중서부지역에 위치하는 경기남부지역은 지정학적으로 마한 중심세력과 백제 중앙과의 교두보역할을 하였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원삼국~백제 한성기에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중요한 고고학적 특징이 발현된다. 그 중 하나가 이 지역에 조성되어 운위되었던 대규모 제철기지였다. 이러한 제철기지는 이미 기원전 3세기, 초기철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고조선을 통해 전해진 전국시대 연나라 계통의 철기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마한 자체의 내제적 발전을 거치는 가운데, 원삼국시대 후기~백제 초기에 들어서 서북한 지역의 군현 이탈 유이민 집단의 이주·정착에 의해 대규모 제철기지화 되었다. 평택 가곡리와 화성 기안리 제철유적 등 원삼국시대 후기 이전까지 경기남부지역에 조성된 초기의 제철유적은 내재적 발전 과정에서 안성천 이남의 마한 중심세력의 직·간접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