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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AND 간행물명 : 백제문화503 개 논문이 검색 되었습니다.
덕진산성의 구조와 축조시기에 대한 검토
박현준 ( Park Hyunjune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109~162페이지(총54페이지)
덕진산성은 고구려에 의해서 처음 축조된 성벽을 통일신라시대에 여러 차례 이상 수축하였고, 이후 필요에 따라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략적인 시기를 살펴보면 초축은 삼국시대 말 즉, 6~7세기대로 추정되며, 축성주체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 공간적 범위는 내성 전역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된 근거로 고구려에 의해 축조된 토축부[치3]에서 출토된 장동호와 시루편, 그리고 주변에 위치한 호로고루와 보루들의 축조시점, 그리고 자연과학적 분석결과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7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신라에 의해 1차성벽[석축부]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개의 치와 치 기저부 강화를 위해 설치한 기단보축은 8세기대에 축조되었으며, 마지막으로 9세기대에 이르러 전면 가공한 화강암제 성돌을 이용하여 2차성벽을 축조한 것으...
TAG 덕진산성, 호로고루, 통일신라, 동파리 보루, 덕진단, 석축부, 외성, Paju, Imjin River, Deokjinsanseong fortress, Horogoru, Goguryeo, the United Silla period, Dongpa-ri fort, crenellated wall (chi), water catchment ruins, Deokjjindan, parts constructed with earth, parts constructed w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서영일 ( Seo Yeongil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199~226페이지(총28페이지)
삼국시대 임진강은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의 경계 지대였다. 따라서 주요 도강 지점을 중심으로 삼국 대립과정에서 축조된 많은 성곽이 있다. 임진강을 중심으로 방어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고려하면 대체로 5세기경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주로 예성강 유역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전투지역이 임진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임진강 북쪽 마식령산맥(임진북예성남정맥) 일대가 격전지였다. 산줄기를 관통하는 고갯길을 중심으로 방어선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후반 경부터 고구려는 임진강의 도강처에 보루라 불리는 관방시설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구축한 것이다. 이후 7세기 전반 경 신라가 임...
TAG 덕진산성, 임진나루, 호로고루, 칠중성, 임진강, 한강하구, Dukjinsanseong Fortress(德津山城), Horogoruseong Fortress(瓠蘆古壘城), Chiljungseong Fortress(七重城), Im-Jin Ferry(임진나루), The Im-Jin River(臨津江), The mouth of Han River(漢江河口)
전남 해안도서지역의 왜계(倭系) 고분과 왜(倭) 5王의 중국 견사
임영진 ( Yim Youngjin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297~319페이지(총23페이지)
전남지역에는 옹관을 매장주체로 한 토착적인 고분과는 달리 수혈식석곽이나 횡혈식석실을 가진 왜계고분들이 있다. 분형에 있어서는 장고형이 대표적이지만 원형이나 방형도 있다. 이 가운데 5세기에 해당하는 수혈식 석곽을 가진 왜계고분들은 해안도서지역에 분포하는 점에서 바다를 통한 백제와 왜의 교류에서 항로의 안내와 관련된 사람들이 그 주인공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백제와 왜 사이의 항로 가운데 특별히 전남 해안도서지역에 왜계고분이 국한되어 있는 이유를 해명하기 어렵다. 왜5왕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중국 견사와 전남 해안도서지역 왜계고분이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점에서 양자의 관련성은 대단히 높을 것으로 보인다. 왜5왕의 중국 견사는 백제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헌자료를 보면 왜는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
TAG 전남, 왜계고분, 마한, 백제, 왜5왕, 중국, Mahan, Baekje, Japanese style tombs, Jeonnam, Yamato, China
7세기 신라 州의 성격 변화와 수취-명주(溟州)와 삭주(朔州)를 중심으로-
김창석 ( Kim Changseok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5~30페이지(총26페이지)
강원도 평창에서 발견된 銘文자료에 `水多寺`가 나와서 慈藏律師가 北小京에 건립한 사찰이 강릉이 아니라 평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639년에 설치된 북소경은 강릉, 평창을 포괄한 광역의 행정구역이었으며 그 治所가 강릉에 있었다. 북소경이 성장하여 溟州가 되었으므로 명주는 中古期말에 이미 광역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朔州의 원형은 牛首州였다. 637년 우수주가 처음 설치되었을 때는 停군단의 주둔지로서 지역 거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군단은 比列忽, 達忽을 거쳐 이동한 것이어서, 춘천-안변-고성이 같은 방어 권역에 속했다. 진흥왕 때 장악한 영서지역의 교통로와 추가령구조곡이 연결되어 568년 황초령, 마운령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통 상황을 기반으로 하여 673년에 우수주는 광역주로 개편되었다. 이밖에 7개의 주는 처한 여건에 따라 각기...
TAG 신라, 지방제도, 수취, 운송, 광역주, 교통로, 명주, 삭주, Silla, Local Administrative System, Tax Collecting, Transportation, Ju (州), Wide Range District, Traffic Route, 廣域州, 溟州, 朔州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박성현 ( Park Sunghyun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31~52페이지(총22페이지)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壽昌郡(?火郡)과 臨?郡(切也火郡)의 郡治는 각각 수창(위화)과 임고(절야화)였지만, 삼국시대에는 大丘(達句火)와 臨川(骨火)이 각각 그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 된다. 이와 같은 군치의 변화에 대해서 기존에는 중앙에 의한 지역(군) 내 세력 관계의 조정이라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본고에서는 공간 구조의 개편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즉 통일기에 들어 王京뿐만 아니라 州治및 小京의 공간에 대해서도 정비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평지에 일정한 시가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군치에 대해서도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금호강 유역 수창군과 임고군의 경우에는 그것과 관련하여 군치의 변경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수창군의 경우, 신문왕 때 달구벌로의 천도 시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당나라 장안성을 모...
TAG 신라, 금호강 유역, 공간 구조, 군현제, 군치, Silla, Geumho River Valley, spatial structure, local administrative system, county town, 郡縣制, 郡治
덕진산성의 축조 연대와 의미
안성현 ( An Seonghyeon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163~197페이지(총35페이지)
덕진산성은 고구려에 의해서 축성된 내성과 통일신라시대에 가축된 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성임이 밝혀졌으며, 고구려는 현재 내성과 동일한 600m의 토성을 축조하였다. 초축 당시 덕진산성의 규모는 임진강 북안에 축조된 성곽들 중 은대리성을 제외하고는 최대형이며, 임진강 중·하류를 통제하는 거점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의 성내부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으므로 평탄지는 협소하였다는 점에서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임진강을 도강하기 유리한 여울목 주변에 덕진산성에 편제된 동파리보루를 축조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삼국이 통일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토성에서 석축성벽으로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으며, 성내부의 경관 역시 이전 시기와 상당히 다르게 변모하게 되는데, 곡부를 비롯한 내부에 대대적인 대지조성이 이루어진 후 기와 건물지가 설치되었다...
TAG 고구려, 덕진산성, 임진강, 동파리보루, 거점성, 판축토성, 석축성벽, 개축, 수축, Goguryeo, Deokjinsanseong Fortress, Imjingang River, Dongpa-rifort, Stronghold, Earthen fortress, Stonewall fortress, Rebuilding, Repairing
덕진산성 보존과 활용의 기본방향
이한용 ( Lee Hanyong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255~270페이지(총16페이지)
파주 덕진산성은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개·보수가 이루어지면서 지속해서 사용된 산성으로 우리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덕진산성 정비·복원의 기본방향은 문화재의 보존이라는 대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활용도를 높이려는 방안을 마련하여 진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포함한 학술조사의 결과에 근거한 접근법이 매우 중요하다. 문화재는 우리 세대가 잘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줄 의무가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 점을 깊이 인식하여 보존과 활용을 염두에 둔 학술조사와 정비·복원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재의 적극적인 활용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문화재 보존방법이라는 인식하에 덕진산성 활용의 기본방향을 지역문화자원, 문화관광자원, 생태관광자원, 안보관광자원으로 구분하여 제시해 보았다. 문화재...
TAG 덕진산성, 정비, 복원, 활용, 보존관리, Dukjinsanseong Fortress(德津山城), Organize, Restoration, Use, Administration of preservation
통일신라기 주(州) 치소성(治所城)의 구조와 물자유통-전주(全州) 동고산성(東固山城)을 중심으로-
서정석 ( Seo Jeongseog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53~80페이지(총28페이지)
동고산성은 전북 전주시에 자리하고 있는 석성이다. 산성이 자리한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곳이다. 따라서 동고산성도 후백제의 도읍과 관련된 산성으로 이해되어 왔다. 마침 동고산성에 후백제의 왕궁이 있었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성내에서 정면 22칸(84.2m), 측면 4칸(14.1m)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가 발굴조사 되면서 후백제의 왕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왕성이 해발 306m에 이르는 높은 山峰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납득이 어렵거니와 기록을 보면 오히려 古土城을 지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고산성의 성격을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동고산성은 입지, 규모, 축성법, 출토유물 등을 감안해 볼 때 통일신라기 全州의 治所城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성내에서는 창고로 판단되는 石壁建物이 발견되어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TAG 치소성, , 석벽건물, 유통, 창고, Local government office, Building with stone wall(石壁建物), Distribution, Warehouse, Donggosanseong Fortress(東固山城), 治所城,
Study on the Construction Technology of Deokjinsanseong Fortress(德津山城)
심광주 ( Sim Gwangzhu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227~254페이지(총28페이지)
城郭은 규모도 크고 복잡하여 축성에 많은 인력과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 대형의 複合構造物이다. 토목 건축기술의 차이로 인하여 축성법은 국가마다 달랐으며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되었다. 따라서 정확한 축성법을 알면 성곽의 축성주체와 축성시기를 알 수 있다. 3차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덕진산성의 성벽은 중심부와 내벽은 흙으로 쌓고, 外壁은 돌로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단은 고구려가 쌓은 土城을 통일신라가 石城으로 개축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安息角`이 유지되어야 하는 토성의 구조적인 특징을 고려하면, 덕진산성은 土城에서 石城으로 改築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토성과 석성을 결합하여 쌓은 `土芯石築城`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토심석축성`은 고구려 성곽의 일반적인 축성법이다. 그러나 덕진산성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주로 출토되었으며, 성돌의 ...
TAG 토심석축공법, 고구려 성곽, 통일신라 석곽, 안식각, 습식쌓기, Construction method of building an earthen base and surrounding it with stones(土芯石築工法), fortifications of Goguryeo, fortifications of Unified Silla, angle of repose, wet construction
4~5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백제의 외교정책
김기섭 ( Kim Kiseob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017] 제56권 271~295페이지(총25페이지)
백제는 濊族, 貊族, 韓族뿐 아니라 漢·倭 출신까지 다양한 종족이 한데 섞여 살았던 多種族, 多文化 국가였다. 백제는 馬韓의 여러 小國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북방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漢문화에 익숙한 낙랑·대방 유민을 대거 흡수함으로써 3세기 말~4세기 초 국력을 크게 키웠다. 그리고 4세기 중엽부터 고구려와 각축을 벌이며 북쪽으로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였고, 남쪽으로 마한의 여러 소국을 병탄하거나 가야·신라·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중국 東晋에 조공하고 근초고왕이 鎭東將軍領樂浪太守 작호를 받음으로써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백제왕의 위상을 높였으며, 樂浪·帶方故地를 경영하는 데에도 매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4세기 후반, 백제는 고구려와 치열하게 다투면서 加耶·新羅·東晋·倭 등 주변나라들과의 외교에 힘을 많이 ...
TAG 백제, 종족, 중국, 낙랑, 대방, 책봉, 고구려, 전쟁, 영토확장, 신라, 가야, , 동맹, Baekje, tribe, China, Nakrang, Daebang, investiture, Goguryeo, war, territorial expansion, Silla, Gaya, Wae, Alli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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