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경 ( Bo Kyung Seo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2014] 제60권 1~26페이지(총26페이지)
7세기 중반의 고대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대립이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자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보존하면서 국내에서 군신 간의 질서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은 난파조정(難波朝廷)에서는 비조시대(飛鳥時代)와 달리 황거(皇居)에 정무기관을 집중시킴으로써 추고조(推古朝) 이래의 정치 과제였던 유위자를 대상으로 한 매일 조참(朝參)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원일조하(元日朝賀)와 사례(射禮) 등 중국적인 의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천황 중심의 관인화를 촉진하고 국가의 위의(威儀)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매일 조참과 연 초의 의례의 장(場)에서는 입례(立禮)와 再拜 등을 예법으로 확립하였다. 따라서 난파조정은 율령법적(律令法的) 차원이 아니라, 관위제와 예제 그리고 의례의 수용과 정비를 통해 군신관계를 확립하고 이를 기반...
김은정 ( Eun Jung Kim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2014] 제60권 27~59페이지(총33페이지)
본 논고는 고대 일본 도성(都城) 공간에 있어 각 통치기에 절회(節會)의 장소가 어떻게 전개 또는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궁(宮)의 중추부를 구성하는 정원(庭園)의 성격과 의미를 해명하는 데 초점을 두고 논지를 전개해 나갔다. 고대 일본에서 절회는 천무(天武)·지통(持統)천황기에 1월 1일·1월 7일·1월 16일의 세 절회를 중심으로 성립하였으며, 701년 대보령(大寶令)이 실시된 이후에 궁정(宮廷)의례로 정착하였다. 절회의 장소는 통치시기에 따라 사용빈도에 차이는 있으나, 1월의 세 절회와 11월의 신상제(新嘗祭) 풍명절회(豊明節會)의 장소는 내리(內裏)(전전(前殿), 자신전(紫宸殿))와 조당원(朝堂院)(풍락원(豊樂院) 포함)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 3월 3일·5월 5일·7월 7일의 각 절회는 내리(內裏)와 조당원(朝堂院)...
이성준 ( Sung Joon Lee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2014] 제60권 61~86페이지(총26페이지)
절대연대자료는 유물복합체의 정밀한 시계열 확보에 기여할 수 있고, 공간적으로 균질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유적의 형성과정과 상호작용의 복원에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고고학에서 지역특성이 반영된 유물복합체의 분포시차를 보다 객관적으로 산출해 낼 수 있는 방법론의 모색은 큰 진전이 없었으며, 경기 및 충청권역에서 400여건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원삼국시대 후기와 한성기 절대연대자료는 유물복합체의 자연과학적인 시간 폭을 설정하는데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고고학적 맥락에서 검증한 절대연대자료를 활용하여 한성양식 토기복합체 분포의 계기성과 효용성을 검토하였다. 한강 이북지역에서 한성Ⅰ기의 시작은 4세기 전후, 한성 Ⅱ기는 4세기 중후반의 자연과학적 절대연대와 관련된다. 한강 이남, 차령산맥...
이홍종 ( Hong Jong Lee ) , 허의행 ( Ui Hang Heo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2014] 제60권 87~118페이지(총32페이지)
세종시 나성리의 금강 하안단구에서 기존의 주거 형태와는 전혀 다른 한성 백제기의 취락 형태가 확인되었다. 도로의 좌우측에 구로 구획한 부지를 마련하고, 내부에 주구를 갖춘 건물지와 그 주변으로 3~4동의 고상식 건물, 수혈유구 등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취락 형태는 그간 알려진 백제시대 취락과는 전혀 다르다. 구획의 규모와 형태가 상당하고, 내부에 다양한 건물을 배치하면서, 넓은 면적의 부지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 일반 취락과는 다른 형태, 즉 도시라는 관점에서 유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는 사회·문화적인 요소와 물리적인 요소가 있는데, 고고학에서는 집주와 생활을 위한 사적인 거주시설, 경제와 여가활동을 담당하는 장소 및 시설물, 공적 공간의 시설물로 이들을 파악하는데, 나성리 유적은 이 모두를 만족시키고 있다. 이처럼 나성리유...
남정호 ( Jung Ho Nam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2014] 제60권 119~151페이지(총33페이지)
백제사에서 무왕·의자왕 대의 정치적 상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일본서기(日本書紀)』황극기(皇極紀)에 기록된 백제 정변의 성격과 이 정변에 관련된 인물들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이는 풍장(豊璋)과 교기(翹崎)가 어떤 인물인지 그들이 도래한 시기와 목적은 무엇인지, 이들이 관련된 백제 정변의 성격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日本書紀』를 비롯한 관련 사료와 연구사를 검토한 결과『日本書紀』서명기와 효덕기에 기록된 풍장은 의자왕의 동생으로, 631년 의자와의 태자 경쟁에서 패하여 왜에 외교 사절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황극기에 보이는 교기는 풍장의 아들로, 풍장이 왜로 보내진 이후 의자에 대한 견제세력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다가 의자왕 즉위 초반인 642년에 일어난 정변으로 인해 역...
본고에서는 호서지역에서 백제 영역화에 따른 취락의 변화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취락 내 여러 구성요소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 결과 각 권역의 원삼국~백제시대 한성기 취락에서 백제 영역화에 의해 발생하는 의미 있는 변화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서지역을 4개 권역으로 구분하여 권역별 취락과 분묘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취락의 구성요소는 입지와 규모, 생산과 저장, 분묘, 방어시설, 중국제 도자기와 기와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이후 취락의 구성요소를 기준으로 A~E유형을 설정하였으며, 이를 통해 권역별 원삼국~백제시대 한성기에 해당하는 중심취락, 거점취락, 하위취락을 살펴보았다. 차령산맥 이북권에서는 전·후 시기의 취락유형에서 별다른 차이점은 없으나 백제시대에 이르러 취락이 규모가 축소되는 양상이 확인된다. 금강 중류권에서는 원삼국시대 B유형 취락이 백제 영...
( Sun Jung Ra ) , ( Jae Yun Chung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2014] 제59권 45~71페이지(총27페이지)
본 논문은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20주년을 맞이하여 백제금동대향로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에 백제금동대향로에 부조된 각종 인물상의 복식을 살펴보고, 복식 속에 나타난 백제 문화의 특성을 분석하였다. 나아가 백제금동대향로와 백제금동대향로 속에 나타난 복식을 활용한 콘텐츠를 예시하여 다양한 활용방안을 제시하였다. 백제금동대향로에 부조된 각종 인물상의 복식의 형태는 주변 국가와 유사한 이부식 구조이다. 여기에 절제된 화려함으로 검소함과 세련미가 깃든 백제적인 요소가 더해져 백제적인 특징이 드러난다. 각종 인물상 복식의 모든 선 장식은 주변 국가와 달리 모두 직선을 띠고 있다. 또한 드레이프성을 살려 인체와 옷 사이에 공간을 부여하여 부드럽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직선 형태의 의복을 착용하면 곡선 형태의 의복보다 편리성·실용성·안락성을 느낄 수 있고...
( Kyeong Mi Joo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2014] 제59권 73~112페이지(총40페이지)
이 논문은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구성과 양식 및 문화사적 의의를 고찰한 것이다. 창건 당시의 매납상태로 발견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는 639년 백제의 왕후가 발원한 것으로, 사리를 봉안한 3중의 사리기와 발원문, 사리를 위해 공양된 각종 장신구 및 유리 구슬, 직물 등 다양한 공양구들로 구성되었으며, 전체 유물의 수량은 9900여 점에 달한다. 한편 2009년부터 조사된 석탑 하부에서도 토제나발과 은제손톱을 비롯한 각종 사리장엄 관련 유물 300여점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佛爪髮 공양풍습과 관련된 공양품으로서 주목된다. 미륵사지에서 사리는 유리병, 금호, 금동호 등 3중의 舍利器와 석조 사리공 등 총 4중으로 봉안되었는데, 이러한 장엄방식은 7세기 전반의 중국 隋代 사리장엄방식의 영향을 받은 ...
( Min Soo Yeon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2014] 제59권 115~137페이지(총23페이지)
『일본서기』의 백제인식은 문물의 수용과 군사적 파병이라는 교류 속에서 나타난다. 일본의 백제에 대한 내관가사상의 배경에는 군사적 파병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고, 이것은 영토할양이라는 허구의 관념과 문물의 수용을 조공의 개념으로 만들었다. 이후 백제 멸망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백제부흥군의 수장으로서의 풍장의 즉위와 파병, 부흥전쟁의 실패, 백제유민들의 망명이라는 왜왕권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질서, 이념을 정립해 간다. 일본국의 왕통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율령을 제정하여 초법적인 존재로서의 천황의 지위를 규정하고, 대외적인 이념으로서 소중화 의식을 발현시켰다. 백제에 대한 번국사상은 이러한 이념 속에서 나왔다. 백제의 부흥군의 수장을 인질과 책립으로 윤색하였고, 백제로부터의 문물의 수용을 조공의 개념으로 바꾸었고, 파병 사건은 천황의 내관가인 백제구원전쟁으로...
( Eun Jung Kim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2014] 제59권 139~167페이지(총29페이지)
본 논고는 平安京 神泉苑의 造營 목적과 특징을 해명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神泉苑은 奈良시대에 조영된 平城京과 長岡京의 諸 정원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정원이었다. 즉 平城京과 長岡京에 존재했던 다수의 정원은 平安京에서는 平安宮 남쪽에 위치한 神泉苑 한 곳에 집중되었고, 정원과 관련된 모든 시설은 神泉苑 내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사용형태에 있어서도 이전의 정원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平城京과 長岡京의 諸 정원이 천황의 감상, 유락의 場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치자에 따라 그것의 사용빈도는 달랐지만 국가행사와 관련된 의식과 향연의 場으로 사용되었던 반면,桓武천황기에 神泉苑은 천황의 私的 공간으로서 遊覽과 宴會의 場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桓武천황기 神泉苑의 사용형태는 平城·嵯峨천황기에 그곳이 7월 7일 節會와 9월 9일 重陽의 場으로 고정되었던 사실을 통해서 볼 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