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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 강원사학회313 개 논문이 검색 되었습니다.
춘천지역과 낙랑,말갈의 관계 검토
김용백 ( Yong Baeg Kim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89~112페이지(총24페이지)
『삼국사기』기록을 통해 최초 맥국의 옛 땅으로 알려져 있는 춘천 지역은 최근 많은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서 한식계토기와 환두소도 등 철기류, 오수전 등 유물들이 집중 출토되고 있어 춘천 맥국 이후 한사군 낙랑의 세력이이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 주고 있다. 초기 백제는 동쪽으로 춘천과 접해 있는 가평까지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이에 낙랑은 춘천의 낙랑 우두산성을 전략 거점으로 하여 대립하는 한편, 영서 내륙과 경기 북부의 맥계말갈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백제 고이왕 대의 기리영 전투는 백제와 낙랑간의 균형을 깨뜨린 계기가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이후 백제는 영서 내륙과 경기 북부 등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반해 낙랑 우두산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
TAG 삼국사기, 백제본기, 춘천 맥국, 낙랑, 낙랑 우두산성, 맥계말갈, 온조왕, 고이왕, 기리영전투, Samguksagi, Baekjebongi, Chuncheon, Maecguk, Nakrang, Nakrang woodu Castle, Maec style malgal, King Onjo, King Goi, Giriyoung battle
여(麗),몽(蒙) 전쟁의 성격과 몽골의 태도 변화
윤은숙 ( Eun Sook Yoon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113~129페이지(총17페이지)
麗·蒙 관계는 1219년 형제맹약으로 출발했지만 저고여 살해 사건을 계기로 30년의 장기전을 치러야 했다. 결국 양국은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안정적인 평화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양국 관계의 시작을 보여주는 1219년 몽골의 주도로 이루어진 형제맹약은 몽골제국의 과다한 공물 요구의 결과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옷치긴이 감국하게 된 몽골 국내 사정의 변화와 대외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전쟁자금은 고려에 대한 몽골의 공물 요구를 한층 강화시켜 고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려는 몽골의 과다한 공물 요구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고 주변국의 동조 등의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켜 저고여 살해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양국의 형제 맹약은 파탄되었다. 아울러 여몽 양국의 30여년 전쟁을 통해 최씨 무신정권은 고려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장기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
TAG 고려, 몽골, 최씨 무신정권, 출륙친조, 出陸親朝, 쿠빌라이, 고종, 高宗, 원종, 元宗, Koryo Dynasty, Mongol Empire, Choi`s political power, 崔氏政權, Qubiliai, Gojong, Chulyukchinjo
고려시대 강원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탈과 대응
손승철 ( Seung Cheul Son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131~154페이지(총24페이지)
고려시대 말기, 40년간은 왜구약탈이 극심하여 고려를 쇠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시기에 왜구는 남해안과 서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강원·함경도지역에 이르기까지 침탈하였다. 특히 1380년부터는 내륙으로 진출하였고, 수도인 開京부근까지 침입하여, 도읍을 옮기자는 遷都論까지 제기되었다. 강원지역에 처음 왜구가 출몰하는 것은 1352년 6월, 江陵道이다. 이 지점은 현재의 강릉으로 추측된다. 1372년에는 안변, 함주, 강릉, 영덕에 침입했다. 그리고 1374년에는 강릉, 양양, 삼척, 회양에 침입했다. 1370년대에 왜구가 강원지역을 침입한 이유는 海路를 이용하는 漕運제도를 폐지하고, 육로운송으로 바꾸었기 때문이고, 이후 점차 내륙지방으로 확산되어갔다. 1381년에는 강릉, 울진, 삼척, 평해 등 해안지역에 출몰했고, 1382년에는 영월, 원주, 회양...
TAG 강원지역, 왜구, 강릉, 삼척, 양구, 영월, 홍천, 춘천, 성곽, Gangwon province, Japanese pirate raiders, Gangneung, Samcheok, Yanggu, Youngweol, Hongcheon, Chuncheon, fortress
여말선초(麗末鮮初) 양구지역 백자요지(白磁窯址) 성립에 관한 연구
정두섭 ( Du Sub Jung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155~185페이지(총31페이지)
양구지역은 고려 시대의 전통적 자기 생산지가 아니었으며 자기가 만들어진 시기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14세기 고려의 사회적 배경을 통한磁器所 해체와 확산과정을 살펴보면 그 시기를 추정하여 볼 수 있다. 忠定王 2년(1350)부터 왜구의 본격적 침입은 남해안에 위치한 전라도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때를 전후해서 해안가는 물론 내륙까지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했으므로 해안 지방에서 가마를 운영하던 장인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가 그 지방의 원료를 사용해서 청자 및 자기를 만들었다. 양구 지역은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 용수와 땔감, 그리고 胎土가 풍족했기 때문에 청자의 제작기술을 지니고 있었던 장인들은 어렵지 않게 정착하여 백자를 제작하였을것이다. 양구의 窯業은 이러한 과정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성계 발원 불사리장엄구...
TAG 강진, 공납자기, 양구, 여말선초, 이성계, Yanggu, The end of the Koryo Dynasty and the early years of the Chosun Dyansty, Kangjin, Yi Seong-gye, Porcelain supplied to the Government
조선사기장과 사쓰마(薩摩) 도자기
이미숙 ( Mi Suk Lee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187~205페이지(총19페이지)
사쓰마(薩摩)는 현재 일본 큐슈(九州) 서남쪽 가고시마현의 옛지명이다. 사쓰마 도자기(薩摩燒)는 이곳 사쓰마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총칭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다도인들은 조선의 도자기를 선호하였다. 茶道人 중의한 사람인 사쓰마지역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조선에 왔을 당시 조선의 사기장을 계획적으로 끌고 온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에서 잡혀온 것으로 전해지는 金海는 사쓰마의 官窯인 帖佐系統의 흐름을지도하고 申武信·申主碩 형제의 도움을 받아 타테노요(竪野窯)의 陶祖가 되었다. 그리고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잡혀온 卞芳中은 쵸사요(帖佐窯)의 창업에 종사하였고, 民窯의 시작인 류몬지요(龍門司窯)의 도조가 되었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잡혀온 朴平意는 民窯풍의 쿠시키노(串木野)계통의 흐름을 지도하고 그의 아들...
TAG 사쓰마, 薩摩, 시마즈 요시히로, 도진의홍, 島津義弘, 사기장, 沙器匠, 금해, 金海, 박평의, 朴平意, 변방중, 卞芳仲, Satsuma, Yoshihiro Shimazu, potter, Kim Hae, Park Pyungeui
『관동지(關東誌)』의 편찬 과정과 사료적(史料的) 특성(特性)
유재춘 ( Jae Chun Yu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207~226페이지(총20페이지)
『관동지』는 19세기 초반 강원도에서 편찬된 地誌로, 크게 보면 강원감영과 각 군현의 地誌, 그리고 莊陵事蹟, 總錄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원도 지역만 따로 떼어 道誌 성격의 별책을 만든 것은 아마 이 『관동지』가최초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국적인 統誌나 道別로 일괄 편찬된 地誌는 당대의 전국적 또는 도별 상황을 포괄적으로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어느 자료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실록이나 각종 등록 등의 관찬 사료에 실려 있는 지역 관련 자료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자료는 대개 산발적이어서 특정 시기의 각 지역 상황을 수평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반면 이러한 전국적, 또는 도별 지리지(혹은 읍지)는 당대 각 군현의 개괄적인 상황 파악은 물론 전국적, 혹은 도별 상황을 수평적으로 비교하여 볼 수 있는 ...
TAG 관동, 강원감영, 지리지, 읍지, 도지, 道誌, Gwan-dong, Gangwon provincial office, Local topography, topography, provincial topography
論文 : 旌善 古城里山城 築城方法 考察
김선주 ( Seon Ju Kim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227~268페이지(총42페이지)
정선 고성리 산성은 해발 450m의 산정상 부근을 한겹으로 둘러싼 산정식산성이다. 둘레는 약 700m로 남한강의 상류에 위치하여 영월-정선-강릉과 삼척, 평창-태백-안동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산성은 각각 4개의 토축성과 석축성이 나누어져 있어 산성의 구조 중 특이한 양상으로 주목받아 왔다. 산성의 축조 방식은 토축성과 석축성이 구분되어 축성되었는데, 조사지역내에서는 토축성이 먼저 토축되고, 나중에 석축성이 석축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토축성의 축조방법은 석회암 기반암 노두 위에 10~15cm 정도 두께로 목탄과 암회색점토층을 깔았으며, 그 위에 석회암을 이용해 지형경사면을 따라 맞물려 들여쌓기하여 토축성 외측 기저부를 조성하였다. 이후 얇게 점토와 석회암을 이용해 2.6m 정도 높이로 판축한 토석혼축기법의 토축성으로 확인되었...
TAG 산성, 토축성, 판축, 석축성, 석축, mountain fortress, mound, hardening(earth work), stone fortress, stone work
조선전기 수직정책(授職政策)의 연원(淵源)과 변화(變化) -수직여진인(受職女眞人)의 현황 분석을 중심으로-
한성주 ( Seong Ju Han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269~287페이지(총19페이지)
조선전기 여진에 대한 수직정책은 조선의 독자적인 정책이 아니라 고려전기부터 시작된 것을 계승하였다고 생각된다. 고려는 중국의 조공책봉제도의 형식을 빌려 고려에 내조하는 여진인들에게 ``將軍`` 칭호와 鄕職을 제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는 여진인들에게 내조에 대한 恩典으로서 관직을 주고稱臣하게 함으로써 고려에 복속하게 하였고, 여진인들을 藩屛으로 인식하였다. 조선의 수직정책 역시 여진인들의 내조와 함께 시행되고 있는데, 조선에서도 이들을 조선의 藩籬·藩屛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복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활용한 측면이 있다. 고려와 조선의 관직 수여 패턴도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고려의 ``장군`` 칭호 수여와 조선의 만호직 수여는 바로 이러한 번리·번병 인식의 산물이라할 수 있다. 이들에게 ``장군`` 칭호 또는 만호직을 수여함으로써 여진인들이 고...
TAG 조선, 朝鮮, 여진, 女眞, 수직정책, 授職政策, 수직여진인, 受職女眞人, 연원, 淵源, 변화, 變化, Joseon, Jurchen, Post conferment policy, Post conferred Jurchen, Origin, Transition
안용복(安龍福)의 제 1차 도일(渡日)에 관한 연구 (오키국(隱岐國),돗토리번(鳥取藩)을 중심으로)
원연희 ( Yeon Heui Weon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289~317페이지(총29페이지)
안용복의 1차 도일은 조선의 쇄환정책을 모르는 일본인이 울릉도를 무인도라고 착각하고, 그곳에서 독점적인 어업권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 증거로서 안용복일행을 인질로 잡아간 사건이었다. 이렇게 납치된 이후의 일본에서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자. 4월에 오키국의 후쿠우라에 도착하여, 번소에서 안용복과 그를 납치한 오오야 가문의 사공들은 취조를 받았고, 번소는 안용복 등을 직접 심문했다. 오키국에서 요나고로 이동되어서는 에도의 지시를 기다린다. 오키국에서 요나고로 이송된 안용복 일행의 조사 내용은 에도에 있는 돗토리 번주에게 보고가 되고, 이것은 다시 막부에게 보고된다. 막부에서 조선인을 나가사키로 이송하여 귀국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진 후, 돗토리번은 돗토리 城下로 안용복일행을 오게 한다. 그리고 그곳의 공회소에서 머물다 돗토리번 측은 이들을 호위하여 나가사키로 보내...
TAG 안용복, 막부, 에도, 울릉도, 오키국, 요나고, 돗토리, 나가사키, Ahn Yongbok, Makbu, Edo, Ulleungdo, Okiguk, Yonago, Tottori, Nagasaki
차기석계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과 이후 동향
엄찬호 ( Chan Ho Eom )  강원사학회, 강원사학 [2011] 제25권 제24, 25집 합본호, 319~342페이지(총24페이지)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은 강원도 지역에서는 1894년 9월 4일 동학농민군이 강릉부를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하여 강릉, 영월, 평창, 정선, 홍천 등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는 차기석이 인솔한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동창을 소각하였고, 서석면 풍암리에서는 동학농민군 수천명이 맹영재 토벌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강원도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중에서 가장 큰 전투였고 8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희생된 처절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동학농민전쟁 이후의 강원도 농민군은 정부와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전개되어진 항일 의병전쟁에 개별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기타 동학교도들은 최시형을 도와 동학 지도부의 보호와 포교에 힘을 기울이고 있...
TAG 동학, 농민전쟁, 강원도, 차기석, 천도교, Donghak, Farmers war, Kangwon-Do, Cha Gi Seok, Cheond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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