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 부량면에는 약 1700여 년의 역사를 가지며 존폐를 지속한 전장 약 3㎞에 이르는 고대수리시설 벽골제가 있다. 벽골제는 1420년 큰 폭우로 일부 제방이 결궤되어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다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전북 동부의 운암제 설치후 김제간선수로로 이용되면서 결정적 훼손을 맞게 된다. 1975년 한 차례의 부분발굴이 진행되었을 뿐 벽골제에 대한 연구는 고고학, 역사학, 수공학, 지질학 등 제 분야의 각론에 머무르고 있다.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식량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니 여러 주군은 제방을 수리하여 완전하게 하고, 논밭과 들을 널리 개간하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농경사회의 통치강령으로 역사시대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벽골제는 근대 이전 농경사회에서 국가기반시설에 해당하는 거대 제언으로 산업적 기능을 담당하였으...
서유구(徐有구)가 남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총 53책 113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갖고 있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촌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족들의 지침서로 편찬하였다. 구체적으로 구복(口腹)을 채우는 식력(食力)과 거향(居鄕)하면서 청수(淸修)하는 선비가 해야 할 양지(養志)에 해당하는 내용을 『임원경제지』에 담았다. 그는 특히 조선(朝鮮)이 직면하고 있던 농업 문제를 개선하고 개혁하기 위한 방안 마련도 감안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임원경제지』를 유서(類書)의 형식으로 편찬하였다. 『임원경제지』는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데 각 지(志)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리지(本利志)』는 농업생산 전반을 다루고, 『관휴지(灌畦志)』는 식용식물과 약용식물, 『예원지(藝원志)』는 화훼류의 일반적 재배법, 『만학지(晩學...
배영동 ( Young Dong Bae )한국농업사학회, 농업사연구[2009] 제8권 제1호, 43~75페이지(총33페이지)
곡식은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 장기 보존형 식재료였으므로, 농민들은 곡식에 대해 신성한 힘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한국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곡식을 넣은 바가지, 단지(독)를 집을 다스린다는 가신(家神)으로 모셨다. 곡식을 섬기고 모시면 집안이 풍요롭고 평안해진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 곡식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한해 처음으로 수확한 곡식은 신성한 곡식으로 여겨졌다. 집안에 모셔진 가신의 신체(神體)인 `삼신바가지`, `성주단지`, `조상단지`, `터주단지`, `용단지` 등은 특정한 용기에 신성한 곡식을 넣은 것이다. 가신의 신체가 된 곡식의 종류는, 가족 구성원에게 일상적으로 생명력을 부여하는 주곡(主穀)인 쌀(벼)과 보리쌀(보리)에 한정된다. 가신의 신체가 되는 쌀과 보리를 해마다 교체하는 바, 이때 나오는 묵은...
김진혁 ( Jin Hyuk Kim )한국농업사학회, 농업사연구[2009] 제8권 제1호, 77~103페이지(총27페이지)
한국인에게 쌀밥은 여러 가지 문화적 의미가 담긴 음식이다. 이 연구는 농촌에서 쌀밥의 문화적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대전지역의 同姓마을인 무수동을 현지 조사하여 실증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농촌에서 쌀이 부족하였고, 쌀밥은 귀한 음식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1973년에 통일벼가 보급된 데 이어, 다수확 품종의 벼가 널리 보급되어 전국적으로 쌀이 남아돌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쌀밥의 전통적 의미는 현대적으로 변화되었다. 전통적 농촌사회에서 쌀밥은 가장 선호되는 끼니음식이었다. 그러나 늘 쌀이 부족하였기에 쌀밥에는 독특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쌀밥은 특히 의례상황에서 수명장수를 빌거나 조상과 소통하는 음식이었다. 쌀밥은 아이를 출산한 산모에게는 기력을 북돋우는 음식이었고, 조상제사 때는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쌀밥은 손님을 ...
김종덕 ( Jong Dug Kim )한국농업사학회, 농업사연구[2009] 제8권 제1호, 105~125페이지(총21페이지)
고서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단어 하나를 잘못 이해함으로서 큰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최근 『救急簡易方』(1489)『訓蒙字會』(1527)에 나오는 `고쵸`를 고추로 잘못 이해나는 바람에 Columbus가 1492년 미대륙에서 재발견하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고추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천초(川椒) 또는 호초(胡椒)를 의미하는 `고쵸`를 고추로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오류이다. 고추의 어원은 고초(苦草)가 아닌 고초(苦椒)이다. 여기에 사용된 고(苦)는 맛이 쓰다는 뜻이 아니라 먹으면 매워 열이 난다는 의미이고, 초(椒)는 천초(川椒) 호초(胡椒)와 같은 초류(椒類)의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救急簡易方』에 나오는 초(椒)는 천초(川椒)를 의미하고, 후추는 호초(胡椒)로 표기되어 있으며, `고쵸`는 문맥에...
구자옥 ( Ja Ock Guh ) , 김미희 ( Mi Heui Kim ) , 노경희 ( Kyung Hee Roh )한국농업사학회, 농업사연구[2009] 제8권 제1호, 127~165페이지(총39페이지)
한 세기 이전의 선조들이 영위하였던 식생활(끼니) 면모를 사실대로 밝혀 알아야 하는 것은, 특히 요즈음과 달리 농업이 대부분 백성의 생업이었던 당시로서, 모든 생활행위에 대한 역사적 발자취를 밝히는 일이다. 따라서 가감없는 진상을 밝히는 일이어야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식생활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당시의 사정을 유추한 사례가 있다. 대체로는 지역의 촌로들을 찾아가 당시의 식생활면모를 청취하고 유추하여 쓴 보고서들이다. 다만 내용이 편중되거나 기억의 오류를 포함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이다. 본 보고는,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일본학자였던 타카하시노보루[高橋昇]가 한국에 머물렀던 26년(1918~1945년) 동안에 이룩하였던 수많은 농학적 업적을 집필하였던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가운데, 비록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당시의 우리나라 8...
최준호 ( Jun Ho Choi ) , 전운성 ( Un Seong Jeon )한국농업사학회, 농업사연구[2009] 제8권 제1호, 167~202페이지(총36페이지)
한국과 일본은 세계 2차대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많은 경제적 제도적 원조를 받았다. 특히,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전국토가 파괴되어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원조는 전쟁피해를 복구하고 나아가 자립경제를 세우는데 일조하였다. 물론, 미국의 원조목적은 빈곤을 퇴치하는데 주목적이 있었으나, 경제적 자립을 통한 반공국가로서의 입지를 키워주는 데에도 있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원조정책의 목적인 미국의 자본주의적인 제도를 이식시키는 과정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렇듯 전후 미국에 의한 한일 양국에 대한 정책의 기조와 내용을 비교하면서, 미국에 의한 대한·대일 원조의 성격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시대 상황을 달리하고 있지만, 아시아의 경제강국으로 등장한 한일양국에 의한 개도국의 경제개발을 위한 대외원조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특히,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