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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AND 간행물명 : 동국사학745 개 논문이 검색 되었습니다.
청대 중기 미가와 인구, 그리고 화폐 -건륭연간 미가변동 해외연구 검토-
홍성화 ( Hong Sung-hwa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5~54페이지(총50페이지)
본 논문에서는 청대 건륭년간의 물가 상승에 대한 원인에 대해서 여러 학설들을 정리하였다. 초기 彭信威와 全漢昇는 주로 재정 지출과 인구 증가를 각각 원인으로 상정하였다. 그 뒤에는 내재적인 요인보다는 외부적 요인, 특히 세계경제와 의 연동 속에서 은유입을 주요 원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점차 통용력을 얻게 되었다. 다만 건륭년간을 두 시기로 나누어서 1736~1775년은 인구증가가 화폐증가 보다 빠르고 화폐증가가 농업성장보다 빠른 시기여서 경제적으로 불황기였으며, B期인 1776~1795년은 화폐증가가 농업성장보다 빠르고 농업성장이 인구증가보다 빠른 시기로 호황기라고 보았다. 반면 岸本美緖는 이에 대해서 건륭초기 역시 호황기였다는 논지에 기반하여 이에 반박하였다. 黑田明伸을 비롯하여 폰 글란, 彭凱翔 등의 1990년대 이후의 연구들은 상당히 많은 경우, ...
TAG 淸代, 건륭연간, 시장론, 화폐, , 동전, 물가, 미가, Qing Period, Qianlong Period, Market, Money, Silver, Coin, Price, Grain Prices
琉球ㆍ日本関係における冠服と詔勅
渡辺美季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55~97페이지(총43페이지)
전근대의 동유라시아 세계에서는 中國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성립하여 기능하고 있었다. 이는 ‘中華’의 皇帝와 ‘夷狄’의 首長 사이에 맺어진 上下/君臣 관계를 기축으로 구상된 것으로 中華皇帝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夷狄首長에게 여러 물품을 頒賜하였다. 여기에서 중심이 된 물품은 皇帝의 명의로 발급된 詔令文書나曆· 王印· 冠服(冠과 服)으로 이외에도 본인의 글씨나 工藝品 등이 頒賜되었다. 이러한 물품들은 무엇보다도 양자의 君臣關係를 상징하는 ‘증표’였는데, 다른 한편으로 당사자 간의 이용에 머무르지 않고 이차 · 삼차적인 수용 · 이용 · 소비가 전개된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한 사례로서 본고에서는 17세기초 이후에 중국(明淸)에 朝貢하면서도 일본(德川政權)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던 琉球를 중심으로 琉球와 일본 관계에서 ‘皇帝의 頒賜品’이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갖...
TAG 皇帝의 頒賜品, 琉球· 日本關係, 冠服, 詔勅, 히데요시 冊封, 皇帝の頒賜品、秀吉冊封
청(淸) 칙사(勅使)· 통관(通官)에의 조선 호피 · 표피 사여와 무역
서인범 ( Seo In-beom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99~147페이지(총49페이지)
조선은 후금 조정에 公禮單을 바치는 외에도 胡差(혹은 金差)에게 별도의 私禮單을 지급하였다. 일찍이 명나라 사신에게도 별도의 예단을 지급한 적이 있었다. 후금은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예단을 강제하였던 것이다. 청조 성립 이후 勅使 편성은 정사 · 부사 각 1명, 通官 수 명, 提督 등으로 구성 되었다. 칙사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날까지 수차례의 宴會가 베풀어졌고 그 때마다 조선은 그들에게 예단을 지급하였다 특히 호피보다는 표피가 예단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청조가 성립한 이듬해 정사 · 부사에게 각각 호피 6장, 표피 29장이 지급되었으나, 태종 홍타이지가 죽고 順治帝가 등극하자 호피 1장, 표피 14장이 경감되었다. 황제의 등극을 자축하는 동시에 조선 백성의 고통을 헤아려 선정을 베푼다는 의식에서 이러한 조치가 취...
TAG , , 호피, 虎皮, 표피, 豹皮, 칙사, 勅使, 통관, 通官, Qing Dynasty, Tiger Furs, Leopard Furs, Royal Messengers, Interpreters
732년 발해(渤海)와 당(唐)의 전쟁(戰爭) 과정 재검토
임상선 ( Lim Sang-sun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149~183페이지(총35페이지)
732년 渤海의 唐 登州 공격으로 시작된 발해와 당의 전쟁은 여기에 新羅도 참여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발해와 당의 갈등의 요인인 黑水靺鞨 문제와 大門藝의 唐으로 망명의 시기 판별은 흑수말갈의 入唐 시기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册府元龜』의 기록에 의하면, 발해와 당의 전쟁 이전에 흑수말갈이 마지막으로 입당한 시기가 開元 18년(730) 5 월이므로, 발해 武王의 흑수 토벌과 대문예의 당 망명은 그 이후에 발생하였을 것이다. 대문예의 처리를 둘러싸고 발해와 당 간에 國書가 교환된 시기는 이때로부터 개원 20년(732) 登州 공격 이전 大姓取珎 등의 발해 사신이 마지막으로 입당한개원 19(731)년 10월까지이다. 발해 무왕이 「敕渤海王大武藝書」 1首를 접수하고 당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에 맞선 대응의 결과가 당이 발해를 침입할 때의 전진 기...
TAG 渤海, , 黑水靺鞨, 武王, 大門藝, 玄宗, 登州, 戰爭, Balhae, Tang Dynasty, The Conflict between Balhae and Tang Dynasty, Heuksu Magal race, King Wu of Balhae, Dengzhou
조보와 실록
김경수 ( Kim Kyung Soo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185~219페이지(총35페이지)
조보에는 군주의 동정과 인사 내용 및 국정 시행사, 전국에서 올라온 상소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승정원에서 발행된 일종의 관보로, 오늘날의 신문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 조보는 국정 시행사가 지방 소읍까지 전달되어 통치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통을 위한 언론 기능을 수행했다. 비밀주의 원칙에 따라 볼 수 없었던 사초에 비해, 공개성이 담보된 조보는 당대 역사와 정국 운영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자료였다. 무엇보다 『실록』 편찬시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사초와 동일하게 인식되었음을 증명한다. 조보와 실록의 연관성과 사학사적 의미 부여가 가능한 이유이다.
TAG 조보, 실록, 승정원, 사초, 관보, Jobo, Sillok, Seongjeongwon, Sacho, The Official Gazette
청일전쟁기(1894~1896) 주한일본영사의 영사보고와 ‘첩보’ 활용
최보영 ( Choi Bo Young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221~264페이지(총44페이지)
본 연구는 청일전쟁기 주한일본영사가 한반도를 대상으로 불법적으로 정보를 취득하고 이를 활용한 실태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개항기 일본영사는 한국 내 정보를 취득 · 수합 · 정리하여 영사보고서 또는 첩보의 형태로 주한공사와 본국 외무성에 공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일 본영사의 정보수집원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보의 유통과정과 그 활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의 한국 병탄은 군사력과 외교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는 인식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한반도전역에 상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군을 이식 · 이주시켜 상업상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한국에 관한 소상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이를 침탈의 토대로 활용하였다. 특히 청일전쟁기 혼란한 상황에서는 첩보를 활용하여 ...
TAG 주한일본영사, 영사보고, 첩보, 밀정, 정보원, 청일전쟁, 동학농민군, Japanese Consul in Korea, A Consular Report, Intelligence, Spy, Grass, The Sino-Japanese War, Donghak Peasant Army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의 상해(上海)-국내(國內)간 교통· 통신망
김은지 ( Kim Eun-jee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265~301페이지(총37페이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국내에 대해 다양한 활동을 모색하였다. 국내를 대상으로 한 활동은 어느 한 부서에 국한되지 않고 내무부, 교통부, 군무부, 재무부, 지방선전부를 통해 전개되는 것으로 전방위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각 부서에서 국내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상해와 국내를 오갈 수 있는 안전한 교통망과 통신망이 구비되어야 했다. 이를 담당한 부서는 교통부로 국내에 임시교통사 무국과 관할 교통사무지국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 결과 중국과 국내의 경계에 있는 안동현 내 안동교통사무국이 설치될 수 있었다. 안동교통사무국의 설치는 안동현 내 이륭양행과 쇼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안동교통사무국은 상해와 국내 각지를 오가는 중간 거점으로서 그 몫을 해냈다. 많은 임시정부원들이 이곳을 통해 국내로 들어가거나 상해로 되돌아왔다. ...
TAG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동교통사무국, 국내활동, 교통부, 이륭양행, 이종욱, 최명식, 교통망, 통신망,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ong Transportation Secretariat, Domestic Activities, Ministry of Transportation, Yiryongyanghaeng, Lee Jong-wook, Choi Myeong-sik, A Transportation Network, Telecommunication Network
만주국 시기 ‘한인 개척민’ 이주 설계자 윤상필의 생애와 활동 : 제국주의 일본과의 협치와 굴종
김주용 ( Kim Joo Yong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303~337페이지(총35페이지)
윤상필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였다. 탁월한 능력과 체력을 겸 비한 그는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육군사관학교 27기로 졸업하였다. 그 가 군인이자 행정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의 일이다. 중국 패잔병의 공격을 받은 한인들을 조사하고 보호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고 그는 1935년 군복을 벗고 만주국 고위 관료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농민들은 그의 손끝으로 만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해방 이후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로 갔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영민하고 비범한 인재였던 윤상필은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던 친일의 오욕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가 외면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동...
TAG 윤상필,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만주사변, 만주국, 이주, 친일, Yoon Sang-pil, Korean Imperial Army Military Academy, Japanese Military Academy, Manchurian Incident, Manchuria State, Migrant, Pro-Japanese
6 · 25전쟁과 한국 보건의학계 및 보건학의 형성
이동원 ( Lee Dong-won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339~374페이지(총36페이지)
이 글은 6 · 25전쟁을 전후하여 한국 보건의학계와 보건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역사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보건의료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로 주로 1960년대 이후를 주목했는데, 이는 일정하게 현실을 반영한 것이지만 6 · 25전쟁의 영향력과 1950년대의 변화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6 · 25전쟁 이후 보건 의학계와 보건학의 형성 과정을 미군정과 유엔군 및 한국정부의 공중보건(Public Health) 활동과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인 의사들의 활동 속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한범석, 윤유선, 백행인, 주인호, 김인달, 양재모, 권이혁, 구연철, 김명호, 방숙, 박재빈 등 한국인 의사들이 한국 보건의료체계 형성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
TAG 공중보건, 예방의학, 보건진료소, 보건소, 공중보건원, Public Health, Preventive Medicine, Public Health Dispensaries, Public Health Centers, The School of Public Health, Korea
당(唐) 덕종(德宗) 정원(貞元) 시기 회서(淮西) 번진(藩鎭)의 성격 -오소성(吳少誠)의 태도를 중심으로-
정병준 ( Cheong Byung-jun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2020] 제69권 375~416페이지(총42페이지)
이 글은 4왕의 난 이후 정원 시기(785~805)에 淮西節度使 吳少誠이 보인 태도를 통해 당시 번진체제의 기본구조를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오소성은 할거 번진 이면서도 다른 할거 번진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즉 기존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 기보다는 주변으로의 세력 확장을 위해 매우 공격적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물론 다른 할거 번진들도 기존의 상황을 그대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오소성은 그 행동 방식과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그런 만큼 덕종도 오소성에 대해서는 다른 대응을 하였다. 정원 15년(799) 8월 오소성이 陳許 번진을 공격하자 마침내 10월 덕종이 17개번진에게 오소성 토벌을 명하였다. 그 안에는 할거 번진인 成德· 幽州· 魏博· 淄靑도 있었는데, 이는 번진들에 대한 당시 덕종의 한계를 보여준다. 오소성에 의한 혼란을 틈 타...
TAG 당 덕종, 회서 번진, 오소성, 할거 번진, 이사고, Tang Dezong, Huaixi Province, Wu shaocheng, Autonomous Province, Li Shi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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