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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380 개 논문이 검색 되었습니다.
신석기시대의 기후 변동과 석기 조성의 변화
이기성 ( Yi Kisung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8권 7~41페이지(총35페이지)
신석기시대 문화 변동을 설명하는데 있어 기후 변화는 큰 기제로 인식되어 왔다. 구석기시대의 종말과 신석기시대 시작까지의 공백기, 동남해안과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문화 등장의 시간적 차이, 신석기시대 중기에 확인되는 유적입지의 변화와 농경의 확산, 신석기시대 후만기의 유적의 해체 등, 신석기시대 문화의 시간적인 흐름에 있어 중요한 획기로 여겨지는 것들은 직간접적으로 기후변화와 연동되어 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신석기시대의 문화 변동 중, 가장 큰 획기로 이야기되는 것은 신석기시대 중기의 내륙 지역으로의 유적 입지 변화와 그에 따른 농경의 수용 및 확산이며, 농경의 수용 및 확산의 증거를 석기의 조성변화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적인 검토에서는 기후 변동과 농경의 수용 그리고 석기 조성의 직접적인 연관 관계를 찾기는 어렵다. 농경의 수용 등은 신석...
TAG 신석기시대, 기후 변동, 석기 조성, 적응 전략, 농경, Neolithic Age, climate change, stone tool assemblages, strategies for, adaptation, agriculture
한국 미술에 호명된 고구려 고분벽화 -해방 이후-1970년대의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송희경 ( Song Heekyung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8권 43~73페이지(총31페이지)
고구려 고분벽화는 한반도의 국혼이 담긴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강력한 국가의 아름다운 묘장 미술로 인식되어 왔다. 한국미술 통사에 수록된 고구려 고분벽화를 살펴보면, 해방 직후에는 일본 고대 문화에 영향을 준 민족 미술로, 1960-70년대에는 우리 그림의 시작점이자 동아시아 고대 회화사의 연결고리로 기술됐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동양화 창작 분야에서 민족성 확립과 현대성 추구를 위한 창작의 해법으로 활용됐다. 특히 이응노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조형성을 채색화의 대안이자 추상의 양식적 근원으로 보았다. 또한 1970년대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 방식, 특히 안료의 재질을 분석하여 동양화 채색에 응용하는 방법론이 발표됐다. 수묵화에 경도된 창작 경향을 극복하고 채색화의 우수성을 표명하여 동양화의 세계화를 이룩하기 위해 고구려 고분벽화가 연구된 것...
TAG 고구려 고분벽화, 윤희순, 김용준, 김영기, 세키노 다다시, 동양화, 추상화, 채색, 이응노, 박노수, 오광수, 이종상, Goguryo tombs mural paintings, Heesoon Yoon, Yongjun Kim, Younggi, Kim, Tadashi Sekino, Oriental paintings, abstract paintings, color paintings, Ung-no Lee, Nosoo Pak, Gwangsoo Oh, Jongsang Lee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등재된 경기도 자기소(磁器所)의 입지 특징과 등재 기준
박정민 ( Park Jungmin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8권 75~107페이지(총33페이지)
이 논문은 『世宗實錄』 「地理志」를 기준으로 磁器所가 등재된 경기도 郡縣의 입지 특징을 파악하여 경기도 자기소의 등재 기준을 추론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전국에 걸쳐 139곳의 자기소를 마련했으나, 전국 모든 군현에 자기소가 등재되지는 않았다. 어떤 목적과 기준에 의해 자기소를 등재한 것이다. 당시 조선정부의 전국 자기소 등재기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道 단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정 등재 기준은 전국에 걸쳐 적용했겠지만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등재 기준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도에는 廣州牧 등 10개 군현에 총 14개의 자기소가 등재되었다. 경기도 자기소는 대부분 경기도의 동쪽 절반에 해당하는 山地 군현에 자리한다. 이 지역은 대부분 숲이 많아 자기 제작이 용이하고, 조선 왕실이 講武場으로 자주 이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 정부...
TAG 자기소, 경기도, 등재 기준, 講武場, 공납, Jagiso, 磁器所, ceramics workshop, Gyeonggi province, Criterion of, registration, Great Hunting Ceremony field, Taxation Supply
조선시대 추고경차관 제도의 운영
허문행 ( Heo Moonhaeng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8권 109~135페이지(총27페이지)
이 글은 조선시대 추고경차관推考敬差官 제도에 대해 분석한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에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중앙에서 경차관敬差官으로 불리는 관원이 파견되었다. 경차관은 국가의 재정, 군사,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는데, 추고경차관은 지방에서 발생한 강상범죄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특별수사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추고경차관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5세기 중반으로 19세기까지 약 250건의 활동사례가 확인된다. 추고경차관은 표류자의 수색, 도적의 체포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16세기 이후 주로 강상범죄綱常犯罪의 조사를 전담하게 되었다. 강상범죄는 왕실王室 혹은 친족親族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를 가리킨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은 국가와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한 성리학性理學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강상사건은 통치이념을 위협하는 요소...
TAG 경차관, 추고경차관, 추고경차관재거사목, 강상범죄, 『추안급국안』, 『추조결옥록』, Kyongchagwan, Chugo Kyongchagwan, Chugo Kyongchagwan-jegeosamok, The definition of moral principles crime, Chuan and Gukan, 推案及鞫案, Chuchogyeoloklok, 秋曹決獄錄
사직공원 조성과 사직단을 둘러싼 ‘개발’과 ‘문화재보호’ 담론의 대립 -일제시기부터 1960년대를 중심으로-
김수자 ( Kim Sooja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8권 137~170페이지(총34페이지)
사직단 및 사직공원은 해방 이후에도 정체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 문화유적 중 하나이다. 일제시기 사직단의 훼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사직단의 기능을 정지시킨 것 외에도 사단과 직단, 두 단만 남기고 나머지 시설물들을 철거, 원형을 거의 찾을 수 없게 만든 것, 그리고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신성시되었던 제의공간을 위락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사직단의 원형은 일제가 패망되고, 해방된 이후에도 6.25 전쟁 등 시대 상황의 급변 등으로 방치된 채 복원되지 못하였다. 특히 1960년대는 도시계획에 따른 ‘개발’에 밀려 사직단의 중심 요소들이 더욱 축소되거나 변형되었다. 사직정문은 도로건설계획에 의거, 보행자 및 운전자들의 운행을 위해 이전되면서 사직단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직단 복원 관련 논의들은 현재뿐...
TAG 사직단, 사직공원, 상징공간, 개발 담론, 문화재보호 담론, Sajik, Sajik Park, Symbolic Space, Discourse on Development, Discourse on, Cultural Heritage Protection
Current Trends and Prospects for the Development of Korean Studies in Russia
( Mozol T. ) , ( Pokholkova E.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8권 173~187페이지(총15페이지)
사직단 및 사직공원은 해방 이후에도 정체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 문화유적 중 하나이다. 일제시기 사직단의 훼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사직단의 기능을 정지시킨 것 외에도 사단과 직단, 두 단만 남기고 나머지 시설물들을 철거, 원형을 거의 찾을 수 없게 만든 것, 그리고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신성시되었던 제의공간을 위락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사직단의 원형은 일제가 패망되고, 해방된 이후에도 6.25 전쟁 등 시대 상황의 급변 등으로 방치된 채 복원되지 못하였다. 특히 1960년대는 도시계획에 따른 ‘개발’에 밀려 사직단의 중심 요소들이 더욱 축소되거나 변형되었다. 사직정문은 도로건설계획에 의거, 보행자 및 운전자들의 운행을 위해 이전되면서 사직단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직단 복원 관련 논의들은 현재뿐...
한국불교사 연구를 일단락 짓다 -정병삼, 『한국 불교사』 (푸른역사, 2020)-
박광연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8권 191~197페이지(총7페이지)
사직단 및 사직공원은 해방 이후에도 정체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 문화유적 중 하나이다. 일제시기 사직단의 훼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사직단의 기능을 정지시킨 것 외에도 사단과 직단, 두 단만 남기고 나머지 시설물들을 철거, 원형을 거의 찾을 수 없게 만든 것, 그리고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신성시되었던 제의공간을 위락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사직단의 원형은 일제가 패망되고, 해방된 이후에도 6.25 전쟁 등 시대 상황의 급변 등으로 방치된 채 복원되지 못하였다. 특히 1960년대는 도시계획에 따른 ‘개발’에 밀려 사직단의 중심 요소들이 더욱 축소되거나 변형되었다. 사직정문은 도로건설계획에 의거, 보행자 및 운전자들의 운행을 위해 이전되면서 사직단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직단 복원 관련 논의들은 현재뿐...
울산 천전리 각석의 가치와 의미
전호태 ( Jeon Hotae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9권 7~39페이지(총33페이지)
울산 천전리 각석은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 종교·신앙적 측면에서 가치와 의미가 큰 유적이다. 빠르면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암각화부터 통일신라시대의 명문까지 여러 시대의 작품이 한 화면에 새겨진 점에서 시대성과 기록성이 풍부하다. 역사시대의 세선각기록화는 특정한 사건과 일화를 그림으로 나타냈다는 점에서 서사성이 뚜렷하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새겨진 한자 명문들은 문헌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높다. 점 찍기 기법으로 제작된 동물과 사람, 깊게 갈아내기 기법으로 새겨진 기하문은 선사시대 각 시기의 예술적 감각과 표현 방식을 보여준다. 천전리 각석의 암각화는 간결하게 대상의 특징만 잡아내 표현하는 한국 고대 예술의 전통이 언제부터 성립되어 전해 내려오기 시작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
TAG 천전리 각석, 암각화, 명문, 가치, 의미, Cheonjeon-ri Gakseok, petroglyphs, records, value, meaning
19세기 조선왕실 혼례용 백자의 구성과 특징
최경화 ( Choi Kyunghwa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9권 41~92페이지(총52페이지)
왕실 혼례는 대표적인 왕실 축제로 국가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이다. 그러나 중대한 왕실 혼례에 사용된 백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체계적 연구 없이 현전하는 몇몇 유물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 이들 백자는 점각명으로 인해 언제, 누구의 혼례에 사용되었는지와 외면에 문양 그리고 기술적 특징(질·굽깎음·굽받침) 정도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왕실 혼례용 백자에 대한 매우 단편적인 인식일 뿐 왕실 혼례용 백자를 예치(禮治)를 기반으로 한 조선왕실의 의례 가운데서 인식하고, 백자 기면에 나타난 문양·기술 이외의 다양한 사실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19세기 가례도감의궤를 분석한 결과 혼례용 백자의 사용 배경인 왕실 혼례의 절차가 유교 예에 입각하여 위계에 따라 차등을 보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사기발기를 통해서는 혼례 소용 백자의 수량...
TAG 19세기, 왕실 혼례, 혼례용 백자, 왕실 의례, 사기발기, 砂器發記, 예치, 禮治
시전(市廛)에서 상점(商店)으로 -광고를 통해 본 근대 초기 상점의 변화 양상 (1890-1910)-
이유정 ( Lee Yujung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2020] 제39권 93~130페이지(총38페이지)
이 논문은 1890년~1910년 사이에 소비되고 있던 외래품의 현황과 이러한 외래품의 유입으로 달라진 근대 초기 조선 상점의 변화 양상과 소비문화의 변화를 살펴본다. 개항 이후 조선의 시장은 전통적 시전(市廛)의 형태에서 점차 근대적 상점(商店)으로의 변화를 겪게 된다. 시전의 외적인 건축 형태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판매하고 있는 품목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 시기의 조선 시장은 간판도 광고도 없는 종로 거리의 전(廛), 전방(廛房) 혹은 점방(店房)이라고 불리는 상호와 가게에서 근대 상점(商店)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드러낸다. 이 논문은 근대식 소비문화로의 전환을 살펴보기 위하여, 당시 새롭게 등장하는 근대적 개념의 상점 모습, 특히 상점의 판매 품목, 규모, 성격의 변화에 주목한다. 조선의 시장에는 기술적인 환경의 변화과 경제적인 구조...
TAG 근대 초기, 근대 상점, 외래품, 소비문화, 물질문화, general store, 1890-1910, foreign products, consumer culture, Korean material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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