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반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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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미국의 세계전략과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국가이익 추구라는 기본적인 틀 속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한반도는 미국의 국익에 중요한 지역으로, 이지역의 안정은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 안보와 직결되고 있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국가이익은 1) 대량파괴 무의 확산 방지, 2) 남 북한간의 긴장완화와 전쟁 재발의 억재, 3) 동맹국가인 한국의 생존보존을 통한 영구 평화체제의 구축, 4)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확산 등 이라고 할 수있다. 냉전시대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 억제라는 대소봉쇄정책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 탈 냉전시대 미국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은 개입과 확대 전략으로, 한반도는 이제 더 이상 대소 봉쇄의 전초 기지가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남북한 간에는 군사적 대립과 긴장이 상존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위협요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한 미간에 긴밀한 군사동맹을 유지하고 남북한의 평화적 대화를 지원하며 정전협정을 준수고 있다. 한 미 안보관계는 지난 냉전시대와 마찬가지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미 안보관계는 상호방위조약을 통한 동맹체제와 주하미군이 핵심이 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의 안보이익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미국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국과 미국에 적대적이고 핵확산금지조약(NPT-National Nonproliferation Treaty)체제에 도전하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전재의 방지와 핵부기 개발 포기 유도라는 억제정책 외에, 개방과 개혁을 유도하여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유도하기 위한 참여와 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극심한 식량난으로 야기된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에 처한 북한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연착륙(Soft-landing)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1. 1860년대
신미양요가 미국과 한반도의 첫 대면이다. 1871년 미국은 1866년에 있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 시키려고 무력침략 하였다. 세기 대 아시아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조선정부를 위협적 외교수단으로 개항시키려 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핵확산금지조약:비핵보유국이 새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과 보유국이 비보유국에 대하여 핵무기를 양여하는 것을 동시에 금지하는 조약.
이때까지 한반도는 이윤을 목적한 다른 국가들과의 각축에 장일 뿐이었다. 해방을 맞이하기 전까지 미국은 조선을 일본의 한 부분처럼 생각을 했을 뿐이라 한반도 문제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악화된 서유럽국가들을 대신하여 미국은 세계(자본주의)의 패권을 장악되고 함께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한반도를 잠정적 통치하게 된다
2. 1940 ~ 1950년대
해방 당시의 한반도 상황 - 미국의 한반도정책은1945년에 시작을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로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전시회담에 있어서 한반도의 독립에 대한 강대국들의 약속은 유감스럽게도 즉각 독립이 아니라 적당한 시기의 독립이었다. 따라서 일제가 패망한 뒤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어느 한편이 독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이 때문에 양국이 남북을 분할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소련군이 먼저 한반도에 도착하여 남하해 왔으므로 미국은 소련의 점령지역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킬 것을 제의하였고, 소련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38선이 확정되었다. 이제 한반도는 미소의 군사적 편의에 의해서 설정된 38선을 사이에 두고 분열, 대립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북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은 모두 점령지역 내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9월 7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의 후신인 조선인민공화국과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군사정부만이 38선 이남에 있어서 유일한 행정부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당시 한국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갖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정치적 구상도 마련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의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이에 따라 한국인 가운데 친일분자들이 미군정에 참여하여 그 세력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세계정세의 변화 속에 미국의 한반도정책 변화 - 미국의 세계전략의 변화와 함께 한반도 정책의 변화도 가져온다. 미국의 세계전략이 이미 냉전이 완전 고착화되는 1947년 3월이나 7월 이전에 중요한 전환을 하게 된다. 1945년 4월 이후 기존의 루즈벨트의 헤게모니전략에서 트루만의 지배전략(에치슨-봉쇄정책)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고 이 결과로 세계 질서는 냉전체제에 이르게 된다. 헤게모니전략은 소련이나 기타 연합국과 미국의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상대방, 곧 소련이나 연합국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하는, 곧 상호협조와 이해를 통하여 미국이 주도적 이익을 확보하면서 상대방의 이익도 상당부문 보장해 주어 서로의 이해관계를 접목시키는 지도력을 일컫는 것이다 . 그러나 지배전략은 주도국가의 일방적 이익을 위해서 종속국가나 비 주도국가의 이익을 무력과 강요를 바탕으로 희생시키는 그래서 제로섬게임의 전략을 의미한다. 전후 냉전은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헤게모니전략에서 지배전략으로의 점진적 변화의 산물인 것이다. 또 조선의 분단은 이미 미소냉전이 세계적 수준에서 고착화되기 이전에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에 기인하였다.
이러한 과정 중에 곧, 헤게모니에서 지배전략으로 바뀌는 시점에서 종전이 옴에 따라 조선은 미소의 공동점령과 공동군정을 통한 신탁통치라는 처음의 헤게모니적 대조선 점령정책에서 지역분할 점령과 남한의 행정기구가 소련이 점령한 한반도전역에 걸쳐 확대되어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킨다는 지배위주의 대조선 점령정책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조선은 지리적 분단을 미국에 의해 강요 받게 되고 민족분단의 행로가 미국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제되었다. 또 공고해져 가는 조선의 분단을 해소하고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던 1947년 6월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7월에 접어들면서 조선인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 합의점을 모색하기에는 너무나 미국의 지배전략이 공고화되었고 미소냉전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체제로 격화되었다.
미국의 대 일본정책의 영향 - 더욱더 한국문제에 대한 타협의 길을 막은 것은 미국의 대 일본정책이 역 정책으로(reverse policy)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1946년 말이 되면, 장개석의 중국을 동북아지역의 맹주로서 동북아안정화에 기여하도록 하고 소련을 동시에 견제하게 하려는 미국의 전후 동북아질서 구상이 장개석의 몰락조짐으로 근본적인 전환을 하게 되었다. 이제 일본에 이 역할을 다시 부여하는 정책으로 바뀌어 일본에 아시아판 마샬플렌을 제공하여 일본을 부흥시키고, 동남아시장을 일본에 제공하여 일본이 소련이나 중국의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미국의 영향권속에 묶어 두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일본의 안보를 위하여 한국을 미국의 영향권으로 구축시키는데 대한 미국의 이해가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는 최악의 경우 남한만이라도 확보한다는 분단정책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소련은 일본의 부흥과 재무장에 극도의 안보불안을 가지게 되어 최소한 북한이라도 확보한다는 정책으로 굳어지게 되어 더욱더 타협의 길은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