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FichteJohann Gottli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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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일의 철학자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FichteJohann Gottlieb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피히테는 1762년 5월 19일에 오버라우지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공업자이자 레이스 제조공인 아버지의 열 남매 중 장남이었다. 마을의 한 목사가-그리고 나중에는 한 귀족이-그의 재능을 발견한 덕분으로 그는 마이센의 시립학교와 포르타의 귀족학교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18세에 피히테는 예나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예나, 비텐베르크, 그리고라이프치히에서 4년간 공부한 뒤, 그는 경제사정이 어렵고 또 목사직에 대해서도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여 졸업시험도 치르지 않고 가정교사로서의 다사다난한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는 정치혁명에 휩싸이고 있던 1790년, 칸트철학을 발견하며, 「모든 계시로 비판」으로 단번에 유명해졌다. 피히테는 예나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1979년까지 활동한다. 이 시기에 피히테는 중요한 저술을 내어놓았다. 「인간의 사명,1800」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1805년 여름에 에어랑엔대학에서 그리고 1806년 여름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잠정적으로 강의를 한 뒤 1809년에 베를린 대학의 설립에 참여한 후 1810년에 이 대학 총장이 되었다. 1807년 프랑스 군대에 의해서 점령된 베를린에서 그는 유명한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하였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프랑스혁명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혁명이 실패하고 나폴레옹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는 해방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청강생들에게 군에 나가 사울 것을 호소하였다. 1814년 그의 부인이 전쟁에서 옮겨온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2)사상적 배경
피히테는 칸트철학의 충실한 후계자로 자처한다. 그는 이론이성 즉 이론적 자아는 대상에 대하여 수동적 태도를 취하는데, 실천이성 즉 실천적 자아는 대상에 대하여 능동적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피히테는 실천이성의 우위를 확립하려고 한다. 피히테에 의하면 대상이란 본래 어떤 작용에 ‘거슬러서는 또는 맞서는’것을 의미한다. 자아에 대하여 대상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아의 활동이 대상에 의하여 가로막힐 뿐만 아니고, 다시 이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아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이와같이 대상의 가로막음을 뚦고 넘어가려는 자아의 활동은 자아의 무한한 순수 활동에서 나온다. 자아의 본질은 무한한 순수활동이다. 자아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세우려고 한다. 이러한 자아를 절대적 자아라한다. 절대적 자아란 물론 유한한 개인적 자아가 아니라 무한한 초개인적 자아다. 그리고 유한한 개인적 자아는 절대적 아라를 이념으로 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한한 자아는 나 아닌 것의 충격이 나에게 대립하는 것으로서 지각되고, 그럴 적에 비아가 이른바 대상 혹은 자연으로 인식된다. 이리하여 피히테는 유일한 자아에 대한 대상의 성립근거를 비아를 절멸코자 하는 자아의 활동에 구한다. 이러한 자아의 활동은 대상에 대한 한 갖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대상을 능동적으로 한정하려는 태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동적 태도는 곧 실천적 자아이다. 실천적 자아를 이론적 자아보다 우위에 두는 피히테의 철학은 자연윤리적 성격을 띤다. 실천적 자아의 목표는 절대적인 자기자신의 정립이라는 절대적 자아의 활동을 지향하므로, 이 목표에의 도달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영원한 당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을 향하여 노력함은 결코 가치 없는 일이 아니다. 이리하여 피히테의 철학은 보통 윤리적 관념론이라 부른다.
3)핵심적인 교육관
ⅰ)교육목적
피히테는 직면한 현대의 과제는 국민을 인간으로서 국민을 인간으로서 완전히 교육하는 일이며 국민 교육이 없으면 애써서 얻은 철학도 널리 이해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교육목적은 국민의 감정에 호소하여 교육에 의한 민족의 중흥을 도모하는데 있었다. 국가만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할 수 있다는 이념, 이 이념을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은 교육뿐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조국애는 국가의 평화유지, 모든 국민의 소유권 인정, 개인적 자유, 생명 및 안녕 질서의 확보 등 보통 목적 이상의 드높은 목적을 지닌 것이라 하여 민족에 대하여 영원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개인의 생명은 오직 민족 속에서만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궁극의 교육목적을 애국심(愛國心)과 자긍심(自矜心)에 두었던 것이다.
ⅱ)교육방법
피히테는 국민교육에 있어서 페스탈로찌의 직관교육과 신체적 노작교육을 존중하였다.
교육은 반드시 구체적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순결한 정신에서 명석한 사고를 기대할 수 있고 그 명석한 인식 위에서 순수 선량한 의지를 단련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피히테는 페스탈로치가 아동교화(兒童敎化)의 이상적(理想的)인 방법에 기초를 둔 것을 찬양하여 그 주의(主義)에 찬동하는 동시에 자기의 고유한 사상을 더하여 독특한 교육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학교교육에서 학습과 작업이 결합되어 농업, 수공, 원예, 목축 등이 행해져야 하고, 여기에서 학생 자신의 노작에 의해서 모든 경비가 지불되고 학교가 하나의 작은 경제 국가하나의 작은 경제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그는 이 노작교육을 확대하여 각 개인은 신분에 따라서 사회 전체의 공동 노동에 봉사함으로써 공동사회에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여 그 의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ⅲ) 『독일 국민에게 고함』의 주요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