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책과 한일 국교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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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국의 정책과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역통합전략은 전후 냉전의 개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러한 지역통합전략은 일본을 지역의 중심축으로해서 아시아의 반공권을 하나로 묶어 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지역통합전략은 완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 이러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미소간의 냉전은 군사적 대치에서 ‘정치경제 전쟁’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제3세계에 둘러싼 체제간의 우월성 경쟁이 냉전의 새로운 초점이 되었다. 또한 미국의 경기후퇴와 국제수지 악화는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에 성공한 서구 제국 및 일본 등 동맹국에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책임분담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런 사정 하에 1950년대 말 미국은 한국의 경제개발과 한일관계 정상화의 연계를 지향함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 한미일 지역통합전략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한일국교 정상화라는 문제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는 그 이전에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청산하고 이에 대한 배상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올바른 역사적 평가 그리고 일본의 사죄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1965년 비준된 이 협정에서 일본은 배상은 물론 사과에 대한 언급 한 마디도 없이 양국 내부의 엄청난 사회적 반대를 무릎쓰고 졸속적으로 체결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 회담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할 수 있는 자본을 얻었지만, 이는 한국경제를 점차 일본의 경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에 와서도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툭하면 일본이 걸고넘어지는 독도 영유권 분쟁과 일본군 ‘위안부’ 보상문제는 한일협정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얼마나 졸속적으로, 그 피해자를 생각하지 않고 체결되었는지 증명해준다. 그리고 양국정부가 기본조약의 2조와 3조(기본협약 제2조-“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대한민국정부가 국제연합 총합의 결의 제195(Ш)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를 서로 교환했다는 혐의도 제기되고 있다. 제2조의 식민지 지배를 합법화하는 논리와 제 3조의 대한민국의 전 한반도에 걸친 유일합법정부 인정 논리는 모두 문장해석 하에 따라서 당사국 정부의 입장을 강화해 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한일 협정을 한번 잘못 맺은 것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 협정으로 인해 먼저 우리 나라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이면서도 큰 소리 치지 못하고 있다. 위안부 보상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고 배상금 문제에 있어서도 과거 그 차관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꼭 잊을 만하면 한번씩 독도의 영유권문제가지고 나오는 것도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대한 정책
미국은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 예상하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이 추진하는 쿠데타를 이미 알고 있었던(한국 쿠데타에 대한 미 중앙정보부의 보고서-1961.4.21~26) 미국은 처음에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과 마셜 그린 미국 대리대사를 전면에 내세워 장면정권지지 선언을 하는 등 쿠데타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결국 군사정권을 인정한다. 미국은 쿠데타 초기에 박정희의 좌익 경력 때문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후에 이들의 철저한 반공정신을 확인한 후 공식적으로 군사정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미국의 제3세계 경제정책도 관련이 있다. 케네디의 경제 자문 역할을 맡았던 로스토우와 밀리칸 등은 제3세계군부를 강력하게 지원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는 당시 여건상 직접적인 경제원조정책에서 경제 개발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경제정책을 바꾼 미국의 입장과 잘 맞물려 있다. 이처럼 미국이 군사정권을 승인한 점이나 월남 파병요청 등은 미국이 1960년대에도 한국이 냉전의 전진기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듯이 미국은 냉전의 성격변화로 인해 한국의 경제성장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한국사회를 안정시킴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더욱더 챙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베트남 파병문제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와 협의하면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하는 등 베트남 참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는 주한미군이 베트남으로 파견되는 것을 막고 전쟁특수를 통해서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모두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행동이 아닐까? 베트남에 주한미군이 파견되면 그만큼 북한의 위협이 커질 것이고 이는 정권 유지에 나쁠 것이다. 또한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한 박정희정권이 처음에 내세운 게 바로 반공과 경제개발이었다. 그만큼 박정권은 경제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우리 나라의 청년들을 팔아먹는 짓을 한 게 아닌가 싶다.)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까지 총 4만 7872명이 베트남 전에 참전했으며,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 6천 회의 군사활동을 수행하여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미국은 국군의 현대화, 한국기업의 베트남진출과 한국상품의 수출지원, 일부 군수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는 등의 이익을 주었다.
물론 한국군의 베트남 전 참전은 우리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주었다. 그렇지만 대외적으로 우리 나라는 미국의 용병이 아닐까 할 정도로 미국에 예속된 이미지를 심어 주었고 베트남국민들에게는 양민학살 등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한때 한겨례 21에서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문제에 대해서 들고 나온 적이 있었다. 일본이 우리에게 배상하고 사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베트남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베트남 전 참전 자체에 대한 문제보다는 양민학살에 문제의 초점을 맞춰 핵심에 빗나가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리 나라의 베트남 참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문제 말고도 우리 나라는 베트남 전에 참전함으로써 최근의 고엽제 문제나 한국인 2세 문제 등 한국사회에도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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