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삼국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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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삼국지 문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원명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며, 또한 삼국의 정사(正史)를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한 책이라는 뜻에서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라고도 부른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서술된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3국이 정립(鼎立)하여 싸우는 이야기는 그 전투의 규모가 웅장하고, 인간의 온갖 지혜와 힘을 총동원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되풀이되는 만큼, 옛날부터 중국인들 사이에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하여 오다가 9세기(당나라 말기)경에는 이미 연극으로 꾸며진 흔적이 있고, 송대(宋代:11∼13세기)에는 직업적인 배우까지 나왔다.
이것이 책으로 엮어진 것은 원나라 지치연간(至治年間:1321∼1323)에 그림을 붙여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3권)이며, 이것은 현존하는 최고본(最古本)이다. 이 책은 일종의 강담용(講談用) 대본 같은 것이어서 문장이 조잡하고 유치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때에는 이 평화(平話)를 바탕으로 하여 많은 희곡이 만들어졌으며, 나관중은 이 평화를 철저하게 개작(改作)하고, 많은 사실(史實)을 곁들여 이 책을 완성시켰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현존하는 최고본은 1494년의 서문(序文)이 있는 홍치본(弘治本)으로, 이 책도 실은 1522년에 간행한 것이다. 24권 240절(節)로 나누어 기술하였으며 이것이 가장 원형(原形)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분권(分卷)을 없애고, 2절(節)을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었다. 청(淸)나라 때는 모종강(毛宗崗)의 개정본이 나와, 이것이 다른 책을 압도하고 정본(定本)이 되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전 ·후반으로 나누어지며, 전반에서는 유비(劉備:玄德) ·관우(關羽) ·장비(張飛) 3인의 결의형제를 중심으로 나중에 제갈 공명(諸葛孔明)이 가담하게 되는데, 절정은 유비와 손권(孫權)의 연합군이 조조(曹操)의 대군을 화공(火攻)으로 무찌르는 적벽(赤壁)의 대전이며, 이것이 위(魏:조조) ·오(吳:손권) ·촉(蜀:유비)의 3국이 분립(分立)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후반에서는 관우 ·유비 ·장비가 연이어 죽은 다음 제갈 공명의 독무대가 되고, 공명이 6차에 걸친 북정(北征)에서 병사(病死)하는 의 1절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소설의 주요인물은 유비 등 3인과 공명이지만, 조조의 성격도 잘 묘사되어 있다. 가장 생기가 넘치는 것은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이며, 특히 장비의 순진하고 솔직한 성격은 중국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는다.
무용(武勇)과 지모(智謀)로 이어지는 전투의 기술(記述)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으나, 이야기의 전개가 적당한 템포로 진행되고,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 가는 수법이 매우 뛰어나 중국의 많은 역사소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예부터 대중적인 읽을거리로 널리 읽혀져 왔으며, 특히 그 속에 담긴 유비 현덕을 중심으로 한 한실(漢室)에 대한 충성이라든가, 공명의 지략, 유비 ·관우 ·장비의 결의 등은 유교적 이념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관우의 장한 의기와 절개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하여 관제교(關帝敎)가 생겨나고, 관제묘(關帝廟)가 곳곳에 세워지기까지 하였다. 신문학(新文學) 이전에는 한문으로 된 원본이 수입되어 읽혔으나 그 후 수많은 국역본이 나와 널리 대중의 인기를 차지하게 되었다.
2. 정사 삼국지 [ 三國志 ]
중국의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정사(正史).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것으로,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린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으나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지 않았다.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위서에만 를 세우고, 촉서와 오서는 의 체제를 취했으므로 후세의 사가(史家)들로부터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촉한(蜀漢)에서 벼슬을 하다가 촉한이 멸망한 뒤 위나라의 조(祚)를 이은 진나라로 가서 저작랑(著作郞)이 되었으므로 자연 위나라의 역사를 중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때문에 후에 촉한을 정통으로 한 사서(史書)도 나타났다. 그러나 찬술한 내용은 매우 근엄하고 간결하여 정사 중의 명저(名著)라 일컬어진다. 다만 기사(記事)가 간략하고 인용한 사료(史料)도 지나치게 절략(節略)하여 누락된 것이 많았으므로 남송(南宋) 429년에 문제(文帝)는 배송지(裵松之)에게 명하여 주(註)를 달게 하였다.
《삼국지》에 합각(合刻)되어 있는 배송지주(裵松之註:裵註)가 그것이다. 이 배송지의 주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기보다는 누락된 사실을 수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어환(魚)의 《위략(魏略)》을 비롯한 하후담(夏侯湛)의 《위서(魏書)》 이하 당시의 사서와 제가(諸家)의 계보(系譜) ·별전(別傳) ·문집(文集) 등 140여 종의 인용문이 기재되어 있다. 이 제서(諸書)는 그 후 태반이 산일(散逸)되었는데, 여기에 인용된 글들이 당시의 사실을 고증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 중에서도 어환의 《위략》은 특히 귀중한 사료가 많이 있어, 이것을 배송지가 인용한 주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다른 일문(逸文)을 추가하여, 청(淸)나라 때 장붕일(張鵬一)이 《위략집본(魏略輯本)》 25권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