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의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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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만중의 문학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후기의 문신, 소설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 서포 김만중은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 의 증손이요,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로 1637년 태어났으며,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이다.
166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쳐 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 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 예조참의, 83년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 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을 집필하였다.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하며,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고 국자의식(國字意識)을 강조하여 허균과 조선후기 실학파 문학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1692년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698년 그의 관직이 복구 되었고, 1706년에는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김만중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현덕하고 학식이 높은 어머니 윤씨부인의 가르침 아래서 자랐다. 어머니의 가르침 속에서 사대부 양반 가문임에도 중세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가치관을 확립시켰다.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지만, 숙종의 변덕에 인형왕후를 폐위시키고, 장희빈을 복위시키는 일에 반대하여 유배되기를 여러 차례 당하고, 암행어사시절에도 임금에게 직언하는 것을 서슴치 않을 만큼 소신이 뚜렷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출 처 : [인터넷] http://www.mct.go.kr/uw3/dispatcher/korea/culture_room/person_v.html?year=1996&month=01
2. 김만중의 문학사상
참고문헌
참고 문헌
정규복 김만중문학연구 「국학자료원」
곽정식 한국문학사상의 이해 「신지서원」
권영민 자율학습 문학 「지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