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군 아차산 최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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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군 아차산 최후의 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그동안 남북한을 통틀어 투구가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뜻밖이다. 그런데 얼마전 고구려 투구의 복발(覆鉢)이 발굴되었다. 복발은 정수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투구의 맨 윗부분이다.
이 복발이 출토된 곳은 어디일까. 고구려 영토는 북한 쪽이니 으레 그곳에서 출토되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서나 이 복발은 1998년 9월 남한에서, 그것도 한강유역의 아차산에서 출토되었다. 이 복발과 함께 1500년 동안 침묵을 지키던 고구려가 한강에 얽힌 비밀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1998년 9월, 아차산
전통적으로 한강 유역은 한반도를 차지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요충지. 서해 해상권이 걸려 있어 이를 통해 중국과 교역을 넓히고 국제 무대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었다. 그래서 한강 유역을 둘러싼 고구려신라백제의 다툼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발견된 유물은 신라와 백제의 것뿐, 고구려의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발견된 고구려의 첫 유물은 학계를 흥분시켰다.
고구려의 유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터. 아차산 헬기장에서 바닥을 살펴보다가 이상한 형태의 토기 아가리 같은 것이 지표면에 어렴풋이 드러났는데, 살살 긁어보니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가 나온 것이다.
그렇게 발굴한 토기들을 서울대 박물관에서 복원했다. 붉은 점토질의 장방형 토기, 평평한 바닥 등 아차산 토기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 붙일수록 고구려 토기의 특징이 두드러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발굴된 토기 수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당시 아차산 발굴단장인 임효재 교수(서울대 고고학)는 고구려 관계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될 거라며 그 의미를 강조했다.
이때 발견한 토기, 무기류 등을 합하면 약 1000여 점. 북한에서도 고구려 관련 유적을 많이 조사했지만 이제까지 나온 토기류를 전부 합쳐도 500여 점밖에 안 된다. 북한 것보다 두배 가까이 많이 나온 것이다.
이 많은 고구려 토기가 쏟아져 나온 곳은 아차산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로, 서북쪽으로 용마산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서울 광진구 및 구리시와 반쯤 걸쳐있는 아차산 일대는 예로부터 지역적인 이점 때문에 한강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삼국사기』24권,「백제본기」책계왕 원년(286년)에 “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해 아단성을 수축하고 방비케 했다(王慮其侵寇 修阿旦城 蛇城備之)”는 기록이 나온다. “온달장군이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죽었다(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는 기록도 있다. 이때 ‘아단’은 ‘아차(峨嵯)’와 표기가 다를 뿐 같은 곳이다.
이처럼 고대사의 많은 비밀과 전설을 간직한 아차산에서 실제 유물이 발견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아차산은 온달장군이 전사한 산으로도 유명하고,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을 죽인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엔 구리시 주민들이 이곳에서 산제(山祭)를 지낸다. 어느날 작은 산불로 인해 전설 속의 아차산이 성곽의 유구(遺構)를 드러냈고 그때부터 시작된 활발한 조사가 전체 발굴로 결실을 맺었다. 고구려 유적의 첫 번째 흔적은 신라의 것과 큰 차이를 보인 온돌이다. 난방보다 취사가 주목적인 신라의 온돌은 벽과 직각으로 짧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온돌은 추운 지방에서 난방을 겸하기 위해 길다란 형태로 벽과 평행하게 이어진다.
이 유적이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지도 의문이다. 학계에서는 군사시설이기 때문으로 본다. 그 증거고 ‘치(雉)’라고 하는, 유적을 둘러싼 성벽의 돌출부를 들 수 있는데 적병이 올라올 때 이 구석으로 몰아 넣고 3면에서 화살을 쏴 저지한 곳이라 한다. 중국 쪽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치와 비교하면 크기만 조금 작을 뿐 모양이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