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미국과 영국의 music&mus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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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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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국의 음악은 역사가 비교적 짧아 겨우 350년을 넘을 정도이다. 미국음악의 역사는 대체로 다음의 3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620∼1800년은 유럽음악이 신대륙에 들어온 시기. 1800∼1860년은 유럽에서의 수많은 이민, 특히 독일이민이 미국의 음악문화의 기초를 만든 시기. 1860년에서 현재에 이르기 까지는 미국 태생의 작곡가 ·연주가의 활동이 확립되고 미국음악이 성인에 이르게 된 시기.
미국의 음악사는 17세기 초두에 백인의 이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각기 여러 곳에 콜로니를 건설하였는데(1607년에 버지니아주의 제임스타운, 1620년 매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 1630년 같은 주의 보스턴), 이 가운데 보스턴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淸敎徒)의 음악활동이 가장 현저하였다. 그러나 그 들의 음악활동은 찬송가의 가창(歌唱)에 한정되고, 새로운 환경을 개발할 의욕도 결핍되어 있었으며, 신앙상으로 음악에서 순수한 기쁨을 찾는 데 죄의식 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교회에서의 찬송가의 가창은 인습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720년경에는 찬송가의 가창방식을 중심으로 한 악전(樂典)이 나타났고, 찬송가의 출판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베토벤이 출생한 1770년에 출판된 W.빌링스(1746∼1800)의 《뉴잉글랜드의 찬송가 가수:The New England Psalm Singer》는 미국 음악사에 있어서 최초의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약동적인 푸가의 기법을 교회음악에 도입하여 ‘미국 교회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노동 을 하면서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는데, 그 작품은 일종의 소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며, 개척자의 생활환경을 처음으로 미국음악에 반영한 음악가로서 귀중한 존재이다. 당시의 음악활동은 그리스도교의 각 종파를 모체로 발달하여 갔다.
영국국교회(國敎會)에서는 일찍부터 오르간이 사용되고, 1713년경에는 보스턴의 킹스 채플에 미국 최초의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또 1760년경부터는 각 지에 합창단이 결성되고, 1769년에는 하프시코드의 제조 ·판매도 시작되었다. 브리스틀의 대성당에서 뉴욕에 파견되었던 W.터키는 1770년에 비록 발췌한 것이기는 하나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미국에서 최초로 공연하였다.
독일의 경건파(敬虔派) 집단은 1694년에 필라델피아 근교에 콜로니를 만들었으며, 그들은 고향에서 악기와 뛰어난 합창기교(合唱技巧)를 도입해 왔다. 미 국이 낳은 최초의 작곡가 C.바이셀(1690∼1768)도 독일 경건파에 소속해 있었는데, 펜실베이니아주에 콜로니를 건설하여 종교곡을 4성(聲)에서 7성까지 의 합창으로 부르도록 지도하고, 1,000곡 이상의 작품을 작곡했다.
또 B.프랭클린은 1730년에 바이셀의 찬송가선집 1권을 출판했다. 펜실베이니아주의 베슬리헴에는 1741년 모라비아인(人)의 콜로니가 설립되었는데, 그 들은 음악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유럽에서의 최상의 음악(하이든 ·모차르트 등)을 미국에 가져와 62년 워싱턴이 그 곳을 방문했을 때는 트롬본합주단이 그를 환영하였고, 작곡가도 많이 탄생하여 현재에도 베슬리헴에서는 해마다 음악제를 개최하여 과거를 기념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연주회는 1731년에 보스턴에서 처음 개최된 이후 18세기에 들어 활기를 띠게 되었고 18세기 중엽에는 미국에서 탄생한 최초의 작곡가 F.홉킨슨(1737∼1791)이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는 영국 작곡가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작품을 써서 ‘미국 작곡가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는데, 친구인 워싱턴에게 곡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18세기 말의 15년 동안에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하여 많은 음악가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그들은 미국의 음악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미국 출신의 음악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1)19세기
19세기에 들어서자 각종 음악단체와 상설 음악기관이 잇따라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808년에 최초의 오페라극장이 뉴올리언스에 건설되고, 1910년에는 뉴욕에 설립된 필하모닉협회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등의 교향곡을 소개하였다. 보스턴의 ‘헨델과 하이든협회’(1815 창립), 필라델피아의 ‘음악기금협회’ (15), ‘뉴욕 필하모닉협회’(20)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연주회에 가는 것이 시민생활에 습관이 된 것도 18세기 중엽부터이며, 그때부터 미국은 연주가로부터 풍부한 음악시장으로서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거장의 한 사람인 L.고트샬크(1829∼69)는 뉴올리언스 출신이지만, 파리에서 교육을 받아 유럽적인 작풍(作風)을 익히고 귀국, 53년에 미국에서 데뷔하여 공전의 인기를 끌었다. 작곡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크리올의 민요를 프랑스풍의 세련된 기교로 잘 표현하였다. 이리하여 거장에 대한 우상 숭배적인 경향이 생겨나 그것은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음악의 특색의 하나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 명성을 얻지 못하면 미국 음악계에서 지위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풍조가 오늘날에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 48년에 일어난 중(中)유럽의 혁명운동은 많은 독일 음악가를 미국에 이주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들 음악가는 세인트루이스 ·신시내티 등의 도시에 모여 음악활동을 개시, 독일음악의 영향은 미국을 풍미하고, 미국 고유의 표현력을 억제 하는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러나 외래음악가를 우대하는 풍조에 저항을 느끼는 음악가들도 나타나 특히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랜드오페라를 작곡한 W.H.프라이(1813∼64)는 52년 “미국 사람들이 미국인 예술가를 지지할 줄 모르는 한, 이 나라 고유의 예술은 육성되지 못하리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