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생애와 문학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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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지용의 생애와 문학활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지용(池龍)이었는데, 이것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꾼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후에 항렬자를 따라 지용(芝溶)으로 고쳤다.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아버지와 친모 사이에는 외아들이었으나 둘째 부인 유씨 사이에 남매가 있었다. 정지용은 당시 조혼의 풍습에 따라 열두 살 때(1913) 동갑의 부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하였다. 이 부인 사이에 3남 1녀가 태어났으며, 그 가운데 차남과 3남은 625 사념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정지용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한창 꿈을 갖고 공부할 나이에 아버지가 결혼을 시킨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인데도 소실을 거느리고 있었던 점 등이 불만의 요인이 된 것이다.
1910년 4월에는 6년제인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4년제의 과정을 마치고 1914년에 졸업하고, 1918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또한 이때부터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요람』 『요람』지는 지금 한 권도 전하지 않아서 그 실상은 알 수 없으나 거기에 지용의 초기시가 여러 편 발표되었다 하더라도 그 시의 형태는 지금의 것과 적지 않은 차이를 지녔으리라 생각된다.
지를 내는 데 참여하여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홍사용, 김영랑, 이선근, 이태준 등과 교류하였다. 1919년 지용이 휘문고보 2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대부분의 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휘문에서도 많은 학새들이 검거되었고, 지용의 1년 선배인 영랑 김윤식도 투옥되었다. 이 해 12월에 『서광(曙光)』창간호에 단편소설 「三人」을 발표하였다. 1922년 3월에 휘문고보 4년제를 졸업하나, 학제개편으로 지용은 1년 동안 머물면서 문우회 활동을 하며 『휘문』창간호를 부장이 되어 기회하고 편집한다. 이듬해인 1923년 3월에 휘문고보 5년제를 졸업하고 작품 「향수」를 썼다. 이해 5월 3일 휘문고보의 교비유학생으로 일본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1926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4월 1일에 영문학과에 입학한 뒤 6월에 경도 유학생 회지인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슬픈 인상화」,「파충류동물」등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1927년에는『조선지광』에 「고향」등을 발표하고, 1929년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9월에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해방이 되어 이화여전 교수로 옮겨갈 때까지 주로 하급 학년의 영어만 가르치면서 시작활동을 하였다.
1930년에 박용철, 김영랑 등과 함께 『시문학』동인에 참가하고, 1933년에는 『가톨릭 청년』지 창간에 참여하여 가톨릭 신앙시들을 발표한다. 그리고 KAPE에 반대하여 이태준,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등과 에 가담한다. 1935년에는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출간하였고, 1939년 이태준과 함께 『문장』지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많은 시인을 추천, 배출하였다. 1941년에는 제2시집 『백록담』이 문장사에서 간행되었고, 1945년 해방과 함께 휘문중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재직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하지 못하고 있다가 좌익계 제자들에 의하여 납북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2. 작품 경향과 문학적 특성
지용의 시 세계는 대개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첫 시집인『정지용 시집』(1935)과『백록담』(1941)으로 구분된다. 초기 시에서 그는 모더니즘을 추구하여 이국적인 정취와 이미지 위주의 시를 썼지만 그 속에는 가족사와 고향에 대한 애착의 정서를 내포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 후 정지용의 시는 종교시의 단계를 거쳐서 이전의 시 세계와는 다른 동양 사상의 세계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서정시
지용의 초기시는 고향상실의 시가 대부분이다. 「해바라기 씨」, 「한울 혼자 보고」는 누나를 그리워하는 동심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으나 기본적인 시적 정조는 외로움이다. 이러한 외로움은 초기시에부터 불안의식을 동반한다. 초기 동시류는 밝고 청순한 세계를 그리면서도, 외로움과 고독을 표출하는 것은 정지용이 ‘모순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고향에 대한 정서 역시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향수」에서는 고향에 대한 강한 애착심을, 「고향」에서는 고향상실감을 노래했다.
2). 모더니즘
정지용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수식어중의 하나가 바로 ‘모더니스트’라는 말이다. 그의 시 세계 변화 양상에 비춰보았을 때 모더니즘 19세기 말 유럽의 지식인들이 교회의 권위 또는 봉건성에 반항하고 과학과 합리성을 중시하며 근대화를 지향하는 데에서 시작된 문예사조. 예술에 있어서는 1920년대 표현주의, 다다이즘, 형식주의, 아방가르드들의 감각적, 추상적, 초현실적 경향의 여러 운동을 가리킴. 기계문명과 도시적 감각을 중요시하여 현대풍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다.
은 내용면에서는 초기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이후의 시에서도 일관성 있게 이미지즘적인 감각적 언어사용을 엿볼 수 있다. 정지용 시에 있어서 이미지즘이란 곧 감각적 심상을 유발하는 현실 세계의 감각화로 볼 수 있다. 직접적인 감정 표출을 피하면서 대상에 대한 감각적 형상화를 통해 현실에 대한 그의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감각적 표현이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근대인 또는 도시인의 생활감정이나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처음 남김없이 표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근대인의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창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인 정지용은 한국 문학이 근대에 들어갈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문학조류의 하나로서의 모더니즘을 도입했을 뿐만이 아니라 문학의 근대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에서 정지용은 김기림의 말대로 ‘최초의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이숭원,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태학사, 1999.
김종태, 『정지용 이해』, 태학사, 2002.
김은자, 『정지용』,새미,1996
윤의섭, 『한국현대 시인론 - 정지용』, 한국문화사, 2005
정지용,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2006.
정조민,「정지용 시 연구」, 원광대 교육대학원, 2005.
윤여탁,“정지용 시의 변모양상과 그 교육적 의미”,현대문학이론학회 제5집,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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