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이후일본의 쌀 소동

 1  러일전쟁 이후일본의 쌀 소동-1
 2  러일전쟁 이후일본의 쌀 소동-2
 3  러일전쟁 이후일본의 쌀 소동-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러일전쟁 이후일본의 쌀 소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러.일 전쟁 후의 공황으로부터 제1차 대전에 이르기까지 만성적인 불황으로 곤란해 있던 일본의 경제는 제1차 대전이 일어나 커다란 호황을 맞이하였다.
아시아 시장에는 면직물 등의 수출이 늘었으며, 해운업과 조선업은 호황을 누리게된다. 대전을 계기로 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일본은 이와 같은 산업의 발전과 수출의 신장으로 국내경제에서도 파급되어 주가도 급등하는 호경기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시기의 자본주의의 발전은 전쟁에 의한 국제시장의 경쟁쇠퇴를 틈타 이루어진 것으로, 전후 열강자본과의 경쟁이 부활되면 다시 쇠퇴할 수 밖에 없는 일시적인 호황이었다.
그러나 이 호황으로 거대 자본으로의 집중이 강화되고, 은행자본도 증대하여 독점자본의 지배체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시게 미쓰비시와 스미토모가 재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또한 대전 말기에는 물가 상승에 대해 임금이 따르질 못하였기에 노동자의 생활이 궁핍하게 되어, 노동운동이나 쌀소동의 큰 원인이 되었다.
2. 쌀소동의 배경
1917년의 러시아 3월혁명, 11월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독일을 피두로 유럽각국의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이 태풍처럼 발전했다. 그것은 일본의 사회주의자를 북돋웠을 뿐만 아니라 제정타도의 3월 혁명은 민본주의자도 호감을 가지고 맞이하였다.
이 세계적인 동요는 일본에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향을 주었고, 사내수상은 1918년5월 지방장관 회의에서 민중의 생활고가 극심하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외국의 영향을 받아 국체를 합치되지 않는 국민사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경계하자고 훈시하였고, 그 2개월 후에 쌀소동은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대전 중의 이상한 호경기는 한편으로 크고 작은 벼락부자를 탄생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가의 폭등, 실질금리의 저하로 노동대중을 심각한 생활고에 빠뜨렸다. 특히 1918년 봄부터 물가 특히 쌀값이 폭등하였고, 3월에는 20전이었던 백미가 7월에는 20전, 또 8월에는 50전을 넘겼으며, 이해에 러시아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과 구미열강의 간섭전쟁이었던 시베리아 출병으로 한몫 보려는 매점매석으로 인해 8월의 쌀값은 2년 전에 비해 3배나 오르게 된다.
3. 쌀소동의 전개과정
물가가 점차 오르다가 1918년에 들어서면서 특히 쌀값이 폭등하였다. 시베리아 출병을 예측한 쌀의 매점매석이 이에 박차를 가했다.
도야마현에서 한 어촌 주부가 쌀의 외부유출에 반대하다가 마침내는 폭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참가자는 자유노동자와 장인이 중심이었고, 미곡상에게 가격인하를 강요해서 들어주지 않으면 기물을 때려 부수고 경찰서와 파출소까지 습격하였다.
이에 정부는 신문기사를 못내게 하고 은사금을 배부하는 한편, 외국쌀을 수입하고 부호에게 기부를 권유하거나 쌀을 염가로 파는 등 여러 대책을 강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