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대왕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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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시대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태종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이를 어기고 셋째인 충녕을 왕위계승자로 지목을 하게 된다. 태종은 총 12명의 부인과 12남 17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두는데, 셋째 아들이 바로 충녕이다. 본명은 ‘도’이고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큰형인 양녕의 일화와 둘째 효녕, 그리고 막내동생 성녕의 일화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양녕은 폐세자가 된 이후 재야에서 풍수를 즐기며 생활하다 사망하였고, 효령은 불가에 몸을 담았다가 성종때에 사망하였고, 막내 동생 성녕은 어렸을 적에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태종이 왕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형제들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 것과 비교해보면 참 우애깊은 형제이다. 세종의 형제들은 세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종의 왕권을 더욱 튼튼하게 지켜주는 존재였다.
효령대군은 9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려 9명의 왕을 섬겼다. 왕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대군의 위치에 있었지만 왕위를 탐내기 보단 평생 왕권을 수호하는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세상의 공명과 부귀영화를 저버리고 초탈한 삶으로 오직 왕실의 번영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공헌하였다.
효령대군은 1396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둘째 아들도 태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효령대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온아문명한 자질을 갖추어 효제충신을 실천하셨으며, 무예에도 능하시어 아버님 태종을 모시고 강원도 평강에서 사냥할 때에 화살을 모두 명중시켜 호위군사들이 경탄했다’고 한다. 또 태종이 병환이 났을 때에 효심이 지극한 효령은 온 정성을 다하여 간병, 완쾌된 후 부왕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12세에 해주정씨를 배우자로 맞이하였고, 17세에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효령대군 존영(관악산 연주암 효령각에 봉안) 경기도 문화재 제81호
효령은 형님인 양녕대군이 세자의 자리를 고사하자, 자신도 재능과 덕을 감추고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세자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이 후 효령은 궁을 나가 자연을 벗삼아서 전국의 큰 절을 두루 살피고 불사에 매진하는 생활을 이어가다가 성종 17년(1486년) 5월 11일 91세를 일기로 허세하여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예장되었다. 시호는 ‘정효’이다.
현재 효령대군의 묘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다. ‘청권사’라고 불리우고, 이곳 청권사 앞의 길에는 ‘효령로’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청권은 ‘신중청 폐중권’의 준말로 ‘몸가짐은 청도에 맞고 스스로 그만둠은 권도에 맞았다’라는 뜻으로서, 중국 주나라 때 태왕이 큰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두고 셋째 아들인 계력에게 양위하려는 부왕의 뜻을 알고 두 형제는 형만으로 가서 삭발문신 은거하며 양보한 미덕을 후일에 공자가 논어 미자편에서 태백을 ‘지덕’, 우중을 ‘청권’이라 칭찬한 유례에서 비록된다. 아시다시피 효령도 아우인 충녕에게 성덕이 있음을 알고 왕의를 양보했다. 세종대왕은 이를 ‘청권’이라고 칭송하였고, 후일 영조가 사당을 세우고, 정조가 사당편액을 ‘청권사’로 사액하였다.
효령대군은 불교활동에 힘쏟음과 동시에 왕권을 수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백성들의 자치규범으로 ‘향헌 56조’를 제정하여 자율적인 윤리도덕과 의식교화 실천운동을 전개하였고, 효에 대한 이론정립과 권계를 목적으로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를 사경하였다. 또 우리나라 국보 제2호인 ‘탑골공원의 10층 석탑’의 건립과 보물 제2호인 ‘보신각종(원각사종)’의 주조를 효령대군이 직접 감독,제작하였다. 또 관악산에 ‘연주암’, 월출산에 ‘무위사’, 만덕산에 ‘백련사’, 양주에 ‘회암사’ 등 많은 사찰을 중건, 중수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나 ‘연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의 우리말 번역을 비롯하여 많은 호국불사를 주장하고 불교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이러한 효령의 영향으로 인해 세종대왕께서도 말년에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하셨다.
효령대군의 아버지는 태종이고 아우는 세종대왕이고 조카는 세조이다. 세명의 왕은 일찍이 우리나라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절대적인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정치를 펼쳤다. 공권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관료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불교가 유교로 교체되고 지방호족들과 공신들의 사병을 해산하여 군권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수반하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격려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바로 효령대군이 담당하였다. 효령대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불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전국의 사찰을 순회하면서 왕권확립과 국태민안의 기반을 다지는데 평생을 보냈다.
만약 양녕과 효령이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왕위찬탈의 기회를 노렸다면 세종이 이룩한 업적들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 태종이 아예 싹을 잘라놓은 점도 있지만 세종을 배신하지 않고 믿고 따라준 형제들이 있었기에 찬란한 세종시대가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많았던 세종의 며느리
세종의 가족사 이야기 중에서 가장 황당한 이야기는 바로 세종의 며느리 이야기이다. 세종은 6명의 부인과 18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 정비인 소현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보았고 첫째 아들이 제5대 임금인 문종이고 문종의 아들이 제6대 임금인 비극의 왕 단종이다. 그리고 세종의 둘째 아들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제7대 임금 세조, 수양대군이다. 세종의 속을 썩인 문제의 며느리는 문종의 아내였다.
세종은 첫째아들 문종의 몸이 부실하고 심성이 심약하여 많은 걱정을 했다고 한다. 태종이나 세종 모두 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올랐고, 이러한 현상은 왕권의 권위와 왕실의 안녕에 위협이 될 만한 문제였다. 세종은 부실한 아들과는 달리 건강한 손주를 얻기 위해서 튼실한 며느리를 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하여 세자보다 덩치고 크고 나이도 많은 김씨를 들이게 된다. 하지만 김씨는 세자의 기를 너무 눌러 소박을 맞고 쫓겨나고 만다.
세종은 더욱 세심하게 새로운 며느리를 찾아나서고 가녀린 체구에 나이도 적당한 청순가련형의 봉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세자빈 봉씨는 겉보기와는 달리 날마다 세자에게 달려드는 색기가 충만한 여자였다. 밤이 무서워진 세자는 세자빈을 피하기 일수였고, 그러다가 동궁의 무수리 권순임에게 마음을 주고 만다. 화가 난 세자빈은 엉뚱하게 자신의 종인 소쌍이와 정을 통하게 된다. 동성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지금도 환영받지 못하는 일인데 조선시대 때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권순임이 임심을 하여 내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자 세자빈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소쌍이 말고도 또 한명의 동성애 상대를 만들게 된다. 세종 18년의 기록을 보면 ‘세자빈의 몸종인 소쌍이와 석가이가 동궁 후원에서 싸움을 하여 소현왕후가 자초지종을 물으니 세자빈 봉씨의 행적이 드러나 폐서인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봉씨는 폐서인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이는 조선왕조의 최악의 왕실 스캔들로 전해내려 오고 있다.
참고문헌
참고자료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사단법인 창권사
조선의 성풍속-여성과 성문화로 본 조선시대, 정성희, 가람기획
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 신봉승, 삶과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