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금속공예의 공백기 조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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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금속공예의 공백기 조선 초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국민대 조형관 지하2층, 쇠 비린내 진동하는 과실에서 하루종이 쇠붙이들과 씨름하는 나는 조형관 대장장이 금속공예학과이다. 나의 할머니의 증조할머니, 그 할머니에 고조할머니가 살았을 때, 보다 훨씬 전인 기원전 6000년 전 쯤에 금속공예는 이미 시작되었다. 광석에서 금속을 분리하는 야금기술에서부터 전쟁도구, 주술도구, 생활도구, 종교도구 등 지금까지 쉬지 않고 뛴 마라톤 보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불을 사용한 것은 약 20만 년 전 쯤으로 추정되지만 불을 사용해서 금속을 분리해내는 기술은 그 보다 훨씬 뒤인 B C 6000~5000년경으로 알려져 왔다.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금속은 동이나 금, 은 등이었고, 이어서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이 만들어 졌다.
과거 영토전쟁이 활발했던 시기엔 한 나라의 국가 경쟁력은 금속의 보유량과 제련 기술이었다. 금속은 힘의 상징이오, 권력의 상징이며, 지배와 침략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던 물건이다. 그래서 국가의 역사에서 철 즉, 금속이 없었으면 백지와 같은 역사가 되는 것이다. 금속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인 동시에 세계사인 것이다.
금속공예란 철, 금, 은, 공. 청동, 아연 등‘금속을 재료로 어떠한 형체를 만드는 것’이나 ‘만들어진 공예품’을 말한다. 이러한 금속공예품은 사용목적이나 용도에 따라 실용적인 면이 우선시되었지만, 점차 더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여러 가지 다채로운 기술과 문양이 첨가되는 공예품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기존에 활발하게 제작되어오던 불교 금속공예품의 제작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으나 왕실의 후원이라 부녀자들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범종과 사리기와 같은 불교공예품이 꾸준히 그 맥락을 이어 갔다.
한국 종의 기본 형태와 세부의장은 고려후기인 14세기 중엽부터 점차 사라지면서 서서히 중국종의 형태와 의장을 받아들인 새로운 형식으로 정착되어 갔다. 이러한 고려 말의 범종양식을 이어받은 조선초기의 종은 음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의 용뉴는 쌍룡으로 바뀐다. 입상화문대는 소멸되며 상대 아래에는 범자무늬가 첨가되고 독립된 문양 띠로 자리 잡게 된다. 연곽은 점차 상대에서 멀어져 아래쪽으로 내려오며 당죄가 가예 없어지거나 있다 해도 그 수나 위치가 일정치 않아 종을 티는 자리로서가 아니라 무의미한 장식문양으로 전락해 버린다.
종신의 중단쯤에는 중국 종에서 볼 수 있는 횡대라 불리는 두세 줄의 융기선 장식이 첨가되며, 하대가 종구에서 위족으로 올라가 배치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종신의 여백에는 비천상이나 불보살좌상 대신에 두 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이 장식되며, 이 밖에 용무늬. 범자무늬. 파도무늬 등을 필요이상으로 시문하여 매우 번잡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그 여백 면에는 대부분 주조에 관계된 긴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 주고 제작과 관계된 인명, 시주자 명단, 발원문등이 빽빽이 기록되어 있다. 명문은 당시의 주금장 사회의 분업상황 소속사찰의 종교적 경제적 현황 등 사회 제반 사항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왕실의 발원을 통한 국가적인 주조 사업으로 이뤄진 대형범종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흥천사종(1462)과 보신각종(1468)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인 17~18세기에는 불교 미술의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되어 사찰마다 전쟁으로 소실된 범종을 새로이 만드는 일이 널리 행해졌는데, 현존하는 사찰 범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범종은 다양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통일 신라나 고려시대의 범종을 모방한 복고적 경향의 작품과 고려 말~조선 초기에 보였던 중국 종 양식의 작품, 그리고 중국종과 한국 전통 종 양식이 혼합된 작품이 만들어지는 등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이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양식의 혼란과 함께 주조기술이 더욱 거칠어지고 문양이 도식화되는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꾸준히 맥을 이어져 왔던 한국범종의 전통이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음을 느낄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사리장엄구는 석탑과 부도에서 발견되지만 사리장엄방식이 단순해지면서 매납되는 사리기의 종류와 양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사리기의 형태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매우 다양해지고, 사리외함으로 백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불상 안에 다양한 시납물을 함께 넣는 것도 조선시대의 특징이다.
조선시대의 금고역시 고려시대 못지않게 많은 수량이 남아 있으나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후기의 작품들로 뒷면이 넓게 뚫린 징의 형태를 하였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문양이 간략화 되어 전혀 시문을 하지 않은 금고가 많이 제작되었다.
불교공예품 가운데 사찰의 사보(종. 운판. 목어. 법고) 중 하나인 운판은 그 수효도 극히 적을 분 아니라 남아 있는 작품도 후기에 한정된 것들뿐이다. 그러나 운판 고유의 형태인 구름 모양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자유롭고도 참신한 감각과 형태를 지니고 있음이 주목된다.
일반 생활 금속공예품으로는 각종 화장 그릇이나 촛대담배합 등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 칠보나 오동을 입사하여 색채 효과를 살리고 있다. 문양표현에 있어서도 불교적 문양보다는 부귀 장수 복을 비는 도교적 성격의 십장생 신선수복 무늬 등이 즐겨 사용되었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호사스러움을 반영하듯 여인들의 비녀와 노리개 같은 장신구류 제작이 늘어났고 촛대와 가위 선비들의 생활용품 및 일상 그릇으로서의 놋그릇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조선시대 금속공예품은 형태가 단순가면서도 형식에 구개되지 않고 자유분방하면서도 화려함 보다는 실용적 기능과 소박함이 강조된 서민적 취향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조선의 예술경지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인 세종대는 금속 공예사 연표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듯 금속공예품의 제작이 현저히 줄어 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세종대인 1419년부터 1450년까지는 이렇다할 공예품이 없는 공백기이다. 보고서를 쓰기 전 의욕적이었던 내 마음은 서서히 고개 숙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난황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자료를 찾아야 할지부터 고민이었다. 설사, 자료를 찾는다 해도 마냥 세종대의 자료는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내가 제일 궁금해 하는 것, 그 궁금증에 초점을 맞춰 보고서를 쓰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