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거타지 설화 및 현대작품 계승 변용연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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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어학 거타지 설화 및 현대작품 계승 변용연 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거타지 설화만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신의 등장과 신이 주는 고난, 고난의 극복, 영웅의 등장 등 그다지 특징이 없는 영웅설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용은 익숙하고 평이한 것이었다. 다른 설화와 마찬가지로 시대적 배경을 찾아보고 세세한 부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는 것이야말로 이 설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여 설화를 분석해나가고 거타지 설화를 계승하고 변용한 작품을 구조와 스토리, 인물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본론
2-①. 거타지 설화 분석
설화 요약 정리
신라 진성여왕 때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양패(良貝)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는데 도적이 횡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궁사 50명을 대동하게 된다. 양패 일행은 곡도(지금의 백령도)에 이르렀는데 심한 풍랑을 만나게 되어 이곳에 10일 동안 묵게 된다.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니 섬에 있는 신지(神地)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일행이 못 앞에서 제사를 지내자 물이 높이 솟아올랐고,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섬에 남겨두고 떠나면 순풍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섬에 남을 사람을 가리기 위해 궁사들은 각자의 이름이 씌어진 목간 50개를 물에 놓게 되고 거타지라 씌어진 목간만이 물에 잠기게 된다. 이렇게 거타지만이 홀로 섬에 남아있게 되고 그 때 한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하기를 자기는 서해의 신인데 매일 해가 뜰 때마다 하늘에서 한 중이 내려와 다라니경을 외우며 못을 3바퀴 돈 후에 자기 가족들을 모두 물위에 뜨게 하여 간을 빼먹어서 이제는 자신과 부인 그리고 딸 하나만이 남아있다고 하며 그 중이 나타나면 활을 쏘아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다. 거타지가 승낙을 하게 되고 서해의 신은 물속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그는 용이 둔갑한 사람이었다. 다음날 아침 말 그대로 중이 내려와 서해의 신의 간을 먹으려고 했다. 그 때 거타지가 활을 쏘자 중은 늙은 여우로 변해 죽었다. 서해의 신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아달라고 하고 딸을 한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 거타지에게 주고, 2마리의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받들고 사신으로 가는 배를 뒤쫓아가 당까지 그 배를 호위하게 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2마리의 용이 배를 호위하고 있는 것에 놀라 임금께 아뢰니 당 임금이 신라의 사신을 비상한 사람이라고 여겨 성대히 대접하고 후한 상(꽃을 비롯한 금과 비단)까지 내렸다. 신라에 돌아온 거타지는 꽃을 여자로 변신시켜 행복하게 살았다.
역사적 배경과 분석
여기까지가 거타지 설화의 내용이다. 이 내용만을 가지고 설화를 읽은 느낌은 막장 중에도 이런 막장내용이 있나 싶을 정도로 어설프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시작부터 혼란이 온다. 진성여왕의 아들로 시작한 이야기는 그냥 거기서 끝이고 더 이상 양패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내용을 시작하고 당연히 양패의 비중이 가장 클 것이라고 생각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일반인 거타지에 관한 이야기로 바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내용전개상 가장 웃긴 것은 서해의 신이라는 존재가 신에게는 정말 하찮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고난을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였다. 결국 중으로부터 서해의 신을 구해낸 것은 거타지라는 한 궁사의 화살 하나였음을 생각해 볼 때 인간에게 풍랑을 줄 수도 있는 강력한 신의 존재가 중에게 화살 하나를 맞히지 못해 풍랑까지 일으켜 가며 화살 한 방을 맞혀주라고 인간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물론 중의 존재를 폄하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서해의 신에게는 천적과도 같은 그런 다른 신적인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허무하게 거타지의 화살 한방에 늙은 여우로 변해버리고 만 것은 그 설득력을 잃게 한다.
설화를 분석한 일선 내용들을 보면 서해의 신은 자기 가족을 잡아먹는 여우를 물리치기 위해 인신공희가 필요했다고 하고 거타지가 곡도에 남겨진 것과 동시에 양패 일행에게 내려졌던 고난은 소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고난이 존재하며 그것은 제물을 수령한 대상인 용왕에게 남겨진 고난이라고 한다. 거타지 설화에서는 인신공희가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물을 수령한 신과 인신공희로 바쳐진 인간의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양패 일당에게 고난을 일으킨 이유가 서해의 신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신공희가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과 인간 사이에 대결구도가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고 결말에 거타지와 서해의 신의 딸이 결혼을 하여 신과 인간이 서로 융화하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한다. 물론 거타지의 영웅적 모습을 통해 희랍의 페르세우스나 테세우스 계열의 영웅설화와 유사하다고도 평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지금의 견해에서 바라보는 설화의 내용과 일선의 해석들은 사실 이해하기 어렵고 용납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의 등장이라든지 한 인간의 등장, 활의 등장과 그것의 역할..등등 얼토당토않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설화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더 얼토당토않는 착오적 발상이다. 설화의 배경시대가 지금과는 당연히 다르기 때문이고 시대를 살펴보며 설화에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현대에도 계승하고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설화가 의도했던 부분들을 살펴볼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다. 중간 레포트에서 살펴봤듯이 경문왕은 집권을 하게 되었던 결정적 계기인 첫째 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첫째 부인의 동생을 둘째 부인으로 맞아 문의왕비로 봉한다. 이 둘째 부인에게서 얻은 여식인 만이 왕위에 오르고 그가 부왕과 함께 신라를 망국으로 이끈 장본인이 된 진성여왕인 것이다. 경문왕의 집권기간에 발생했던 천재지변과 질병 그리고 단 13차례만의 구휼, 임해전 중수, 황룡사 답 개조, 월상루 중수, 등 권위만을 높이는 일에만 골몰한 사실을 살펴보았고 인간됨됨이까지 보았었다.
진성여왕은 즉위하고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민심을 수습하며 발 빠른 정변을 시도했다. 보위에 오르자마자 옛날의 정부였던 위홍을 궁 안으로 불러 남편으로 섬기며 신명나는 정치를 펼치려 하였으나 위홍은 2년 만에 죽고 말았고 진성여왕의 상심은 매우 컸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정치적인 기강은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했고 상심을 감당하지 못한 진성여왕은 미소년들을 불러들여 시중을 들게 하고 그들에게 높은 관직을 주며 성희롱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삼국사기 진성여왕조에 “겨울 내내 눈이 내리지 않고, 3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고, 5월에는 가뭄이 들고, 4년에 햇무리가 다섯겹이나 끼웠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아 보릿고개가 발생하였다는 걸 추측하게 해준다고 하고, 3월 초하루의 일식은 임금을 상징하는 해가 월광개에 먹혔으니 임금의 권위가 흔들림을 상징한다고 한다. 5월의 가뭄은 이러한 피폐상황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4년에 햇무리가 다섯겹이 끼었다는 것은 왕권이 굉장히 쇠약해진 것을 말한다고 한다. 또한 농경 문화권에는 자연현상이 농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에 자연을 숭상하고 위무하였기 때문에 자연이변이 발생하면 그 모든 책임이 왕에게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봤을 때 당시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치기강의 문란, 과다한 부세, 도적들의 봉기, 흉년 등의 제 요인이 민중을 궁핍하게 한 것이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최치원은 신라를 구하기 위해 가진 애를 썼으나, 여왕을 감싸고 있는 인사들에 의해 정치개혁은 불가능했다. 토호들은 세금을 바치지 않고 독립을 선언했고 후백제의 견훤과 후고구려의 양길과 궁예가 들고 일어나 신라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고 만다. 여기저기서 반란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신라는 경주 부근에만 남게 되자 진성여왕은 10여년 간의 정사에 막을 내리고 효공왕에게 선위했다. 물러앉은 진성여왕은 사랑했던 위홍의 영정을 짓고 명복을 빌다가 6개월 만에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