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사 정리 (고대, 중세, 근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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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문학사 정리 : 고대, 중세, 근대 문학
Ⅰ. 서언
문학이란 인간이 자연, 사회, 인간세계와 같은 객체에서 중요한 주제를 언어를 매개로 해서 구상화한 것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다. 문학사는 문학이 발생하고 발전해 온 역사적 과정을 통시적으로 고찰하여 기록한 것으로 말 그대로 문학의 역사이다. 따라서 문학사는 인간의 역사적 과정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김석하의 한국문학사에서는 시대구분이 문학의 질적 변화가 나타난 과도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사회나 사상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고려를 하면서 구체적인 근거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즉 단순히 왕조사에 의한 시대 구분이 아니라 그 시대의 큰 사건이나 변화를 중심으로 시대 구분을 한 것이다.
Ⅱ. 고대문학 (통일 삼국 이전)
우리나라는 강토와 혈통의 단일성, 언어와 풍습의 공통성에 의하여 규정된 단일 문화였다. 우리나라 민족문화의 역사적 기원을 이루는 원시 문화는 선조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창조적 노동의 역사적 산물로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게 발전된 문화였다. 자연 정복을 위한 줄기찬 투쟁, 이 과정에서 축적된 노동 경험과 생활 체험은 사람들에게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인식 능력과 사회 도덕적 관념을 키워주고 미적 관념과 예술적 재능을 배양시켜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은 씨족 공동체가 형성된 구석기 시대 후기에 와서 노동 도구의 제작과 같은 단순한 문화의 창조로부터 벗어나 원시예술 문화를 발생시킨 주객관적 요인이 되었다. 회화 및 조각 예술품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예술적 형상 능력과 함께 원시 사회 사람들의 정신생활, 그들의 신앙과 종교의식을 알게 한다. 또한 노래와 춤 역시 중요한 종합 예술의 하나이다. 옛 문헌들에 의하면 선조들은 노래와 춤을 매우 즐기었으며 그것은 그들의 생산 활동과 생활에서 뗄 수 없다. 봄 파종이 끝났을 때나 가을걷이를 한 다음에 제천의식을 진행하며 며칠씩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노동의 성과를 즐겼다. 원시 사회에서 문학은 아직 예술 문화에서 독자적인 분야를 이루지 못하였고 다른 형태들과 융합되어 발전하였다.
원시 문학의 기본 형태는 바로 가요와 신화이다. 원시 가요와 신화는 노동 과정에서 발생 발전한 생산 활동과 정신생활의 예술적 반영이다. 무리를 지어 살면서 집단적으로 일한 씨족 공동체의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소리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노동의 피로를 줄이며 쾌감과 기쁨까지 준다는 것을 체험하고 그를 더욱 발전시켜 자기들이 생활 감정과 정서를 노래 부른 최초의 소박한 가요를 창조하게 되었다. 원시가요는 처음에 춤과 밀접하게 결합된 원시 가무의 형태로 발생하였다가 후에 분리되어 독자적인 문학 형태로 발전하였다. 신화는 생산력 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에 놓여 있던 원시사회의 조건에서 그들의 정신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환상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씨족 형성이후 시기에 와서 사람들은 자연 정복을 위한 노동 과정과 점차 심화되는 인간관계 속에서 미숙하나마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영혼이나 신과 같은 그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여겼으며 그 신비로운 힘은 자기들의 생활에 도움도 주고 위협도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기들의 힘과 인식 능력의 제한성으로부터 생긴 자연과 사회에 대한 왜곡된 관념과 표상은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사상 등 여러 가지 신앙심과 종교적 관념을 낳게 하였으며 그것은 신화 발생의 정신적 근원이 되었다. 신화는 이 처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연과 사회에 대한 관념과 표상, 그에 기초한 신앙심과 종교적 관념에 토대 하여 생활을 반영한 설화 형태의 산물로 그들의 생활을 반영한 가장 이른 단계의 문학 현상이다. 원시시대에 창조된 신화는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계급적 분화가 일어나서 원시 공동체 사회가 무너지고 계급 국가가 출현한 후 윤색되고 개작되어 통치 계습의 권력과 그들의 국가를 정당화하고 신성화하는 데 이용되게 되었다. 고대 국가 형성과 관련되어 있는 건국 설화들은 대체로 원시시대에 창조된 신화들을 기초로 하고 그것을 국가 출현 당시의 사회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는 방법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고대 계급 사회의 새로운 현실은 개인 서정 가요의 발생과 그 발전을 촉진하였다. 사적 소유 관계가 나타나고 노동과 사회 활동에서 개인의 역할을 증대시켰는데 개인의 역할의 증대는 시가 분야에서 개인 서정 시가의 출현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정서와 감정을 반영한 서정 가요의 출현은 시가 문학 발전에서 획기적 의의를 가진다. 공후인은 현재 남아 전하는 유일한 고대가요이다. 공후인은 원시 가요와 달리 주제 사상이 명백하고 내용도 당대 현실에서 빚어진 구체적인 사실에 토대하여 선명하게 표현했다.
삼국 시기에 우리나라의 문화는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는 각각 자기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단일한 민족문화로서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삼국 시기의 문화의 발전에서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북방의 고구려는 가장 일찍이 한문화를 수입하여 문화면의 발달도 삼국 중 제일 앞섰다. 고구려의 대표적 문학작품으로는 황조가가 있다. 황조가는 유리왕이 지은 것으로 서정이 솔직하면서도 뛰어난 비유가 사용되어 그 의의가 크다. 백제의 현존하는 유일한 가요는 정읍사이다. 정읍사는 행상을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아내가 부른 노래로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장 오래된 가요이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형성됐지만 문화의 수준은 가장 높다. 외래한 문화, 사상, 종교까지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향가는 신라를 대표하는 고대가요일 뿐만 우리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장르이다. 향가의 명칭에 대하여는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크게 도솔가, 사뇌가, 향가 등의 용어가 보인다. 그 당시 문자로 정립시킬 수 있는 국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의 문자인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기록되었다. 향가의 형식은 4구체, 8구체, 10구체로 구분된다. 현존하는 향가 25수중에서 4구체가 4수, 8구체가 2수, 10구체가 수이다. 향가는 한민족의 사상, 감정, 서정을 나타낸 최초의 정형시이며 향가의 장르적 성격은 단순하지 않다. 우선 향가 가운데는 풍요와 같은 민요도 있고, 혜성가, 도솔가와 같은 의식가도 있고, 이와 달리 개인작의 서정가요도 있다. 그래서 향가를 제신가, 민요, 사뇌가로 3분하여 장르체계를 세우기도 하고, 이보다 더욱 세분하여 민요, 예능요, 제신가, 담가, 불사요, 장가, 창작가요 등으로 하위범주를 설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향가를 세분할수록 서로 겹치는 경우가 많다.
설화는 현실 생활을 비교적 자유롭고 폭넓게 반영할 수 있는 구전문학 형태로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창조되어 전승되는 과정에 더욱 다듬어지고 세련된다. 설화의 특징은 그 내용과 형식의 단순성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인물의 단순성, 사건의 단순성, 배경의 단순성 등으로 풀이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작품의 감정이나 분위기도 단순하게 된다. 역사가 발전하고 현실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능력이 높아짐에 따라 설화는 신화 뿐 아니라 전설, 민담, 동화, 우화 등 다양한 형태들을 가지게 되었다. 신화와 전설이 어떤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데 반하여 설화는 믿음을 초월한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르다. 설화는 구전 되다가 한자로 기록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히 부연도 되고 각색도 되었다.
이 시기는 한자의 도입기로 중국 문학 양상의 전적인 차용이 이루어졌고, 언어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이두나 향찰을 만들기도 하였다. 정치·외교문서, 역사기록, 비문 등 주로 실용적 목적에 따른 창작이 많이 이루어졌다.
Ⅲ. 중세문학 (통일삼국시대~고려말)
고구려, 신라, 백제의 영토와 권력싸움이 확대되다가 7세기 후반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 시기 문화와 예술ㆍ문학은 불교, 유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였다. 통일 신라의 집권층은 삼국 통일 전부터 장려하여 오던 풍류 사상을 계속 강조하고, 불교를 적극 내세웠다. 신라는 골품제사회였는데 후에 골품제의 모순과 호족들의 세력 성장으로 신라는 분열되었는데 이를 왕건이 다시 통일하고 고려를 세웠다. 이 시기에는 고려 왕조의 실록 편찬 사업과 각종 역사 문헌들의 편찬, 저술 사업이 활발히 벌어졌다. 그리하여 고려 봉건 왕조의 실록들이 체계적으로 편찬되었고 삼국사기가 저술되었다. 또한 금속활자, 고려자기 등 과학적 발명과 예술적 창조물들이 창작되었다. 12세기 후반~14세기에는 고려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민중들의 의식이 성장해나갔다. 이 때 문학은 현실 생활을 보다 진실하게 반영해 나감으로써 획기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사실주의적 경향의 시문학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농민들과 양반지배계급의 판이한 생활형편을 그리거나,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과 애국적 감정을 노래한 시들을 많이 내놓았다. 이 시기 문학 분야에서는 고려국어가요, 경기체가, 시조 등 새로운 민족시가 형식들이 출현하여 발전하였다. 고려 한문학은 전 왕조의 계승이었다. 후고구려의 계승과 신라의 선양이었으며 이로 인해 전시대 문화의 점진적 발전이 가능했다. 또 시문학적 소양을 가진 인재를 발탁하는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후에 무신난으로 인한 문신의 수난은 오히려 문학 자체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항전문학은 항몽의 정신적 지주로 민족의식을 고조시켰고, 민족사를 재인식할 수 있었다. 또 국제적 신흥 문학 조류로서의 유교문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
경기체가와 속요는 바로 전 시대의 시가 양식인 신라 향가의 전형적 서정 형식을 이어받아 우리 고전 시가의 중요한 시가 형식인 조선시대의 시조 및 가사를 창출하게 한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고려 속요는 한때 고속가나 장가로 불리기도 한 것으로, 그 형성 시기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고려 예종 11년의 송나라 대성악 수입 시기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속요의 작자는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고려 속요가 원래 재래의 민요를 새로운 궁중 무악 혹은 연악으로 재편하여 수용하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원래 민간에서 유포·전승되던 민요가 궁중의 속악 가사로 수용되면서 개편되었다가 한글 창제 이후에 문헌에 기록되어 전승되면서 본래의 작자는 사라졌다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