岸曙안서 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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岸曙안서 김억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岸曙(안서) 김 억
I. 생애와 활동
호는 안서(岸曙), 호적명은 희권(熙權). 1896년 11월 30일 평북 곽산에서 출생하였다. 오산중학을 거쳐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熟) 문과를 중퇴했다. 그 후 오산중학 및 평양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으며, 동아일보·매일신보 기자, 경성 중앙방송국 차장 등으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8.15후 출판사 수선사(首善社) 주간을 역임하였고, 6.25 당시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되었다.
김억은 서구시 및 시론의 번역소개와 아울러 창작시를 병행 제작함으로써 한국 초기시단을 이끌어간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1914년 4월『학지광』창간호에 시「이별」「야반」「나의 적은 새야」산문시「내의 가슴」「밤과 나」를 내놓고, 이어서 1918년『태서문예신보』에 10여 편의 창작시와 서구 상징시를 번역 소개하였다.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소개하고 최초의 번역시집인 『懊惱(오뇌)의 舞蹈(무도)』를 실음으로써 상징시풍을 1920년대 초기시단에 정착시킨 바 있다. 문학작품의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신념하에 우리말의 어감과 어향(語響)에 맞게 번역함으로써 번역을 통한 한국어의 가능성에 충격을 추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징시를 음악성과 감상성에 편향하여 받아들인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1925년 이후에는 전통지향성으로 회귀하여 한시 번역에 치중하였고, 제자 김소월(金素月)을 문단에 길러내어 그와 함께 1920년대 민요시 창작에 참여하였다.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살려낸 민요시 제작을 위하여 ‘격조시(格調詩)’라는 이름으로 장시 『지새는 밤』을 내놓기도 하였다. 1923년 근대 최초의 개인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발간한 것을 시작으로 『불의 노래』(1925), 『안서시집』(1929), 『안서시초』(1941) 등 20여 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II. 시적 형식과 리듬의 인식
1) 초기의 시와 시론
안서의 문학경력은 크게 초기와 전기,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문학은 1924-5년경을 기준으로 큰 변모를 보이는데 전기는 자유시형, 외래지향, 서구시의 번역소개 등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반면 후기는 소위 격조시형, 전통지향, 고전 및, 한시의 번역과 소개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한 편 초기는 안서가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1918년 이전에 해당한다.
그의 문학초기에 있어서는 주로 상징주의의 수입과 관련하여 자유시 또는 산문시를 모색하면서 그의 시 세계를 탐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시기도 그가 서구의 문학에 심취해서 자유시나 산문시만을 모색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민요적 시를 모색하고 있었다. 김억의 첫 창작집인 『해파리의 노래』에는 1915년의 작품이라 하여 몇 편의 시를 싣고 있다. 서문에서는 이 작품들이 1915년의 것, 오래된 것들이며 조금도 수정도 가하지 않고 실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北邦(북방)의 小女(소녀)」題下(제하)의 작품들 중에는 이미 민요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그가 시작 초기부터 민요적 시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안서의 최초의 문학론인 「예술적 생활」에서 인생의 향상은 곧 예술의 향상이고 예술의 향상은 인생의 향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인생과 예술의 합일을 주장한 그의 논지는 후반에 가면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바뀌어진다.
만일 藝術(예술)이 人生(인생)에게서 製作(제작)된다는 理由(이유)로써 人生(인생)의 附屬物(부속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人生(인생)이 人生(인생)에게서 낫다고 해서 人生(인생)을 人生(인생)의 附屬物(부속물)이라고 하는 것과 가튼 結論(결론)에 지게 될이니 이에서 甚(심)한 矛盾(모순)과 偏見(편견)은 업슬 것임니다. 김억, 「예술의 독립적 가치」, 1926.11.-1.3
그의 이러한 생각은 道德(도덕), 因習(인습), 制度(제도)등을 인위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모든 것을 귀찮은 현세구속을 떠나서만 生(생)의 본능적 충동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른다. 김억, 「프로문학에 대한 항의」, , 1926.2.7-2.8
그가 이렇게 문학의 사회성 내지 윤리성을 부정하고 예술지상의 편향에서게 되는 데에서 그의 예술관은 결국 현실도피 내지는 역사의식의 결여로 귀결되는 것이다.
2) 전기의 시와 상징주의 소개
『학지광』에 프랑스 상징주의를 소개했던 김억은 1981년에 『태서문예신보』가 나오면서 한결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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