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 팔 대가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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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 팔 대가 그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당송팔대가,
그들은 누구인가?
당송팔대가란?
당송팔대가란 중국 당(唐)나라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宋)나라의 구양 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 8명의 산문작가의 총칭하는 말이다. 한유·유종원은 육조 이후 산문의 내용이 공소(空疎)하며 화려한 사륙변려체(四六驪體)의 문장인 데 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운동(古文運動)이다. 이 운동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점차 기세가 약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표현과 착상의 연구가 뜻의 전달성을 희박하게 하였고, 또한 도덕지향(道德指向)의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도학 냄새가 짙은 것이 원인이었으며, 그 반동으로 당나라 말기에서 5대에 걸쳐 육조식(六朝式) 탐미적 산문(耽美的散文)이 부활하였고, 북송(北宋)의 천성기(天聖期)가 되자 구양수가 한유의 문집을 규범으로 하여, 알기 쉽고 유창한 산문을 만드는 혁신운동에 앞장서, 이 운동으로부터 소순·소식·소철·증공·왕안석 등 우수한 문학자가 배출되었다.
당송팔대가라는 병칭(竝稱)은 송나라의 진서산(眞西山)이 처음으로 주창하였고, 뒤이어 당순지(唐順之)가 당나라·송나라의 우수한 작가를 이 8명으로 묶어 산문선집 《문편(文編)》에 수록하였으며, 다시 명(明)나라의 모곤(茅坤)이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160권)를 편집하여 보급하였다.
한유
자는 퇴지(退之)이며 하내(河內) 남하양(南河陽 = 현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 출신으로 중국 당나라 문학가이며 사상가이다. 한유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한 사람으로 24살에 진사가 되였다. 그 후 추천에 의해 사문박사(四門博士), 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을 지냈다. 원화(元和) 10년(815)에는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지어 헌종(憲宗)의 노여움을 사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으나, 후에 목종(穆宗)의 부름으로 수도로 돌아와 이부시랑(吏部侍郞)이 되었다. 그 후 57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중국 문학사에 있어서 그의 공적으로 산문의 문체개혁을 들 수 있다. 옛 도를 배우고자 하면 옛글에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듯이 한유의 고문운동은 문체 개혁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고명도(復古明道)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고문운동의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실천가로 뛰어난 산문들을 남겼는데, 많은 논설문, 서정산문(抒情散文)을 통해 산문을 한층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데 공헌했다. 한유의 산문은 사상성과 예술성을 겸비하고 있다. 설리문과 서정 산문 외에 우언(寓言) 전기(傳記), 서사문, 비지(碑誌) 등의 글이 뛰어나다. 논설문인 〈논불골표(論佛骨表)〉, 〈원도(原道)〉, 〈원훼(原毁)〉, 〈사설(師說)〉, 〈진학해(進學解)〉 등은 논리가 정연하고 문장이 유려하다. 우언 전기인 〈모영전(毛潁傳)〉과 〈송궁문(送窮文)〉, 〈잡설(雜說)〉 등은 구성이 새롭고 우의(寓意) 또한 잘 드러나 있다. 서정 산문인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 〈제정부인문(祭鄭夫人文)〉 등의 문장은 시어와 같은 어휘와 세밀한 묘사들을 통해 강렬한 감동을 주고 있다. 특히,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의 경우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천고(千古)의 제문(祭文)으로 칭송되고 있다. 서사문으로는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敍)〉, 〈오자왕승복전(者王丞福傳)〉 등을 비롯해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 등이 있다. 문집으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40권이 전해진다.
유종원
유종원(柳宗元)의 자는 자후이며, 유하동, 유유주라고도 불린다. 원적은 오늘 산서성 영제인데 후에 장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종원은 관리가정에서 태어났다. 유종원의 아버지 유진은 전중시어사 등의 관직에 있었다. 유종원의 소년시절은 당나라 중기 각종 사회폐단과 당쟁으로 동란이 형성되던 시기로 유종원의 아버지는 관직이 자주 바뀜에 따라 자리를 옮겼는데 이로 인해 그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닐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회와 접촉하고 시야를 넓혔다.
정원 9년(793년) 21살인 유종원은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었으며, 관직에 있을 때 한유, 유우석 등과 친교를 맺고 당나라 시기 고문운동을 창도했다. 그는 고문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을 이루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교, 도교, 불교를 참작하여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롭고 합리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 우언 형식을 취한 풍자문과 산수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문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 정채함이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시를 특히 잘 지어 도연명과 비교되었고 왕유, 맹호연 등과 당시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 우언시에도 뛰어나 우분애원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