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thing he can not ask Mi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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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There is nothing he can not ask Milton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There is nothing he cannot ask”: Milton,
liberalism, and terrorism
3. 해석적 드라마(The interpretive Drama)
여기에 캐리(John Carey)의 질문에 대한 그다지 짧지 않은 답이 있다: 피쉬(Stanely Fish)는 삼손(Samson)의 행동이 훌륭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복종의 표현으로써 의도 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어디에서 얻는가? 나는 바로 이 희곡에 대한 논거를 포함한 밀턴의 저작들로부터 이를 확신한다. 본 희곡에서 시인은 삼손의 내적인 설득이 정말로 하나님이 그에게 하도록 명하신 것과 일치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내리지 않고, 삼손을 “내적으로 설득된” 존재로서 설명하고 있다. 나는 또한 같은 글들에서 캐리가 인간은 그 결과가 아무리 극악무도 하더라도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과 연관시킨 위험에 대한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가장 주된 위험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응하여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뜻이 촉구하는 데 반응하여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독선의 허울로 그들이 행한 죄악을 가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칸(Victoria Kahn)은 실정법을 넘어서서 도덕률에 근거해서 정당화된 예외 상태를 주장하는 “국가이성(reasons of state)”에 대한 논의에서 요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칸이 언급하였듯이, “도덕률을 이렇게 참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이는 그것이 하찮은 편의나 사리사욕을 정당화 하는 것을 모른 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기를 “애초부터” “삼손의 임무는 스스로를 예외로서 이해하는 것이다”(1078) 그러나 이것은 물론 확실하게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스스로를 실정법에 예외적인 존재로서 인식하고 있는 그/그녀는 아마도 그것을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어떤 것이나 해도 되는 자격을 확보하는 것으로 생각할 지도 모른다. 성 바울(Saint Paul)은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죄를 지을 진데, 이는 우리가 법 아래 있지도 아니하고 은총아래 있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다”(로마서 6장 15절). 우리가 은총아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이라도 해도 된다는 의미인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성 바울이 말한다. 그리고 밀턴이 이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진술하는데, “기독교인들로부터 요구되는 삶은 덜 완벽한 삶 일 것이나, 사실 그 삶은 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삶보다 더욱 완벽한 삶이다.(YP 6: 531) 법이 도입 된 목적,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YP 6: 531)은 그것이 더 이상 심지어 성서를 포함한 외부의 법규에서는 설 자리가 없지만,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쓰여져 있으며, 마음으로부터 그들은 그 법규를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어려움이 비롯된다. 왜냐하면 법이 쓰여져 있는 마음은 그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외부적 권위나 시험의 부재 속에서, 개인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경건한 바램을 구분하는 것을 매우 힘든 임무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고 불안으로 가득 찬 것이다.
이것이 매순간 삼손이 하고 있는 것을 완벽히 설명해 주고 있다.
코러스(Chorus)가 말 하듯이(코러스가 항상 틀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laboring)” 있다(1298). 즉, 그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현 상황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을지 결정하려고 노력한다. 본 희곡의 드라마는 내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해왔듯이 드라마는 해석적인 것이며, 해석상의 위험은 그들이 얻는 만큼 높은데, 영원한 생명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죽음일 수도 있다. 가장 큰 질문이자 본 희곡의 모든 사람들이 답하려고 시도하는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그 모든 상충하는 안건들, 지침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들과 합리화 하는 설명들 중에서, 복종으로 향하는 진실한 통로를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설명하기로는, 본 희곡 속의 행동은 발견으로 구성되는데, 이 발견은 독자와 등장인물 모두에 의해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세상의 가시적인 표시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방안이나 시험, 혹은 알고리즘의 형태를 지닌 권위 있는 답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캐리를 매우 격분시킨 그 판단에 의해서 내가 의미할 수 있을 전부이다:이 판단이란, 삼손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그의 내부적 바램을 외적인 몸짓으로 행한 것이라는 한에서 있어서, “그것은 고결한 행동”이며 “그 행동을 평가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괜한 말일 수 있지만, 내가 한 가지 추가한다면 평가기준이 없다는 것은, 본 희곡에서 평가기준이 없다는 말이다. 캐리는 삼손이 행한 것에 대한 설명을 해줌으로써, 내가 그 행동을 지지하고 또한 내가 그 행동에 부여한 이유까지 지지한다고 생각한 듯하다.-“나는 갈구하고 있다...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PR 2: 259)-. 그러나 나는 도덕이 아니라 문학비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독해 말고는 어떤 것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독해의 근간은 종교적으로 영감을 받은 폭력에 대하여 내가 가질 수 있는 어떤 개인적인 관점이 아니라, 모든 다른 기준 혹은 모든 외부적 신호에 대해서 본 희곡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권위의 해체(de-authorization)이며, 이것이 아마도 해석적 확신을 가져다 줄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 삼손이 힘을 다시 회복한 것, 데릴라가 여러 번 호소한 것, 어떤 “각성의 움직임”의 형태로 그의 정신을 회복한 것, 사원이 무너진 일,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은 것 하나님의 사랑을 잃었다고 가정하지만, 이와 같은 가정은 삼손에 의한 것이며, 희곡에서 이를 인정해 주고 있는 부분은 없다.
과 같은 사건들 사이에서 인과관계가 성립 된다면, 해석적 확신, 혹은 최소한 해석에 있어서의 자신감이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필수적인 요소들, 즉 삼손의 힘 회복, 데릴라에 대한 삼손의 저항, 그리고 삼손이 각성의 순간을 경험하고 사원을 무너뜨림과 같은 내용이 희곡에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이 요소들은 이야기의 다른 버전들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했다고 명확하게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지 않다. “사원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답들이 있다. 이 답들은 삼손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코러스, 마노아, 하라파, 데릴라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며, 그것들 중 어떤 것도 명확하게 확인된 것은 없다.
이러한 해석적 지침 제공에 대한 거부는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등장인물들에게 머물게 하며, 삼손의 현재, 과거, 미래의 행동이 지닌 중요성에 대해서 논쟁하지만, 그것을 평가할 만한 어떤 독립적이고 가시적인 기준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한다. 데릴라와 삼손의 관계에서 삼손의 조치는 정직, 순수한 의도와 같은 것으로 인간이 주장할 수 있지만 증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라파와의 관계에서 블레셋 사람은 가시적이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험적인 방법들을 가지고 삼손에게 대항함으로써 존 캐리의 역할을 한다. 그는 묻는다. 어떤 하나님이 “살인자이자 반란자이며 강도인” 챔피언을 받아들일 것인가(SA 1180)? “어떻게 너는 나에게 이러한 것들을 증명해 보일 것인가?”(1181), 삼손은 대답하고, 그 블레셋 사람은 구체적인 행동들을 지적하면서 대답 한다: 너는 이런 저런 일들을 했고, 그리고 이런 다른 잔학행위들도 저질렀다, 이 모든 것들이 네가 “우리의 신에게 복종하는” 동안 저지른 것이다. 삼손은 먼저, 다른 때 같으면 혐의가 있을 나쁜 행동들도 전시에는 허용가능 하다는 전통적인 주장으로 대응한다. “폭력에는 폭력/은 정복당한 자가 할 수 있을 때 잘 드러난다”(1206-1207). 그러나 그 후 삼손은 더 깊이 믿었다는 점에서 그의 더 강하고 진실한 입장에 의지하게 된다. “나는 평범한 한 사람이 아니라 천상이 부여하신 충분한 힘과 명령으로 길러진 사람이다(I was no private but a person raised/With strength sufficient and command from Heavn)”(1211-1212) 혹은, 다시 말해서, 당신이 강도, 살인자, 반란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하나님에게 복종한 결과라고 일컫는다. 이는 내가 이러한 것들을 천상의 명령에 따라 행하기 때문이며, 그 행동들은 정당화 되고, 그것들을 평가할 만한 어떠한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4. 도덕률 폐기론(율법무용론)(Antinomianism)
물론, 삼손이 그의 행동들의 동기에 대해서 설명한 부분들이 나의 설명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 그 설명이 올바른 것이라든가 밀턴이 승인한 설명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설명들을 기반으로 우리는 삼손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데, 내가 믿기로, 삼손은 밀턴과 마찬가지로 도덕률폐기론자 이다. 즉, 성령과 덜 고결한 설득들 사이의 차이점을 구별하는 것이 항상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서 생각하면, 그는 그의 행위에 대해, 행위의 외적인 정당화보다 그의 내부에서 성령이 행하시는 내적인 정당화를 더 선호한다. 번즈(Norman Burns)는 “중세시대부터,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위법에서 암시되어 있는 도덕률폐기론은 보통 그들이 신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하면서 길들여진다.” 나와 마찬가지로, 번즈는 밀턴이 “판관기에서 발견되는 삼손의 캐릭터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며...삼손을...신앙의 도덕률폐기론자 영웅으로...”(28)보게 된다고 확신한다.
분명히, 삼손을 도덕률폐기론자라고 부르는 것이 그에게 씌어진 테러리스트의 혐의를 벗겨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덕률폐기론자”가 테러리스트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가능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실히 스테릿(J. MacBride Sterret)의 관점이며, 그는 신학사전에서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