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인물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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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교신 인물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 교 신 (1901~1945)
[김교신선생님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실천한 교사였다. 수첩에 담임한 학생들 이름을 전부 적어놓고 매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묵상을 했다고 한다.]
1, 생애와 사상적 배경
김교신은 한국의 종교인이자 교육가이다.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엄격한 유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유교사상을 습득하였고 조국과 민족의 암담한 미래 앞에서 고뇌하였다. 그 후 기독교를 만난 후 그는 일제로부터 조국과 민족을 구할 길은 기독교 진리의 보급과 이를 토대로 한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입학했으며,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가르침 아래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며, 1927년 졸업과 더불어 귀국하여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주의 교육과 국적 있는 역사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7년부터 월간지 "성서조선"의 간행을 시작 하지만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극심한 겨울 추위에 다 얼어 죽고 용케 살아남은 두세 마리의 개구리에 대한 단상(斷想)을 그린, 권두언의 "조와(弔蛙)"가 당시 일본경찰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조선의 민족혼을 찬양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면서 , 이로 인해 전국의 독자들도 구속되고 잡지는 모두 압수되었다. 성서조선은 폐간 되고, 신앙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흥남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에서 5천 여 조선인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진력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두고 1945년 4월 25일 타계했다.
**청년 손기정 가슴에 민족혼 지핀 스승
손기정을 키운 것은 교사 김교신(1901~45)이었다. 김교신이 가르친 것은 마라톤만이 아니었다. 일본어로만 수업을 하게 하고 한국말로는 사담조차 못하게 했던 그 시절, 그는 배짱 좋게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한국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좌절한 식민지국 청년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를 심었다. 김교신과 함께 도쿄에 가서 베를린 올림픽 예선전을 통과했던 손기정은 훗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스승의 눈물만 보고 뛰어 우승할 수 있었다”고 했다.
2. 종교관
그의 신앙관, 특히 개인 구원관은 성서적이다. 그는 죄를 사회적, 실정법적, 윤리적 개념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떠남과 인간 중심주의적 태도로 규정하고 있다. 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한 구원에 관한 성경의 근본사상, 특히 바울의 구원론에 전적인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그는 그의 책에서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연구한 바로 이 말은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종교 다원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기초는 교회가 아닌 성서에 있다는 것과 교회가 믿음이나 구원의 기초가 아니라는 입장 즉, 교회지상주의에 대한 반박의 표현으로 사용한 개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의 신앙관에 있어서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은 그와 교회관을 달리했던 평양신학교 신학자 김인서 교수도 인정한 바이다.
그는 또한 부활의 역사성 및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몸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이나 영혼불멸설의 아류 등으로 보는 견해 혹은 부활의 목격자들의 고백을 심리적 현상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견해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몸의 부활을 철저하게 신봉하였다.
하지만 그는 스승 내촌감삼(內村監三)의 영향을 받아서 성서적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적 시각으로 변형된 창조론을 더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결국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만인구원론을 성서조선지에 실었다가 한 독자로부터 해명을 요구받는 일까지도 있었다.